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1위 – 조용필

JOHN CENA 2020. 11. 27. 06:55

[[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1조용필 ]]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시리즈, 그 첫 번째 시간.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1, 조용필. 한국 대중가요 역사상 최고의 슈퍼스타이자 살아 있는 전설, 가왕 조용필에 대한 이야기가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조용필이 어떠한 음악 인생길을 걸어왔고 어떠한 기록들을 세워 왔는지는 사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면 웬만한 정보는 누구나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절의 시대상이라든지 사회 분위기 같은 것은 아무래도 그 시대를 살아오면서 직접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이 아주 큰 도움이 될 수 있겠죠. 조용필의 최전성기였던 1980년부터 1986년 사이에는 저도 이 세상에 갓 태어나서 막 걸음마를 떼고 유치원을 다니던 시기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저 역시 그 시절의 분위기를 온전하게 증언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저보다 좀 더 연배가 있는 분들의 증언을 참고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예전에 2002년에 한겨레신문 인터넷 게시판에 <MBC 10대가수 가요제><KBS 가요대상>의 역대 수상자를 중심으로 가요계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정리해서 올려주셨던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글을 읽고 저도 가요계의 역사에 대해 좀 더 체계적으로 조사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당시 그분의 글은 현재는 인터넷에서 아무리 검색으로 찾아보려고 해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일부 내용을 토대로 해서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옛날 신문기사도 검색해보고 저보다 연배가 좀 있는 분들이 블로그나 유튜브 같은 데서 증언한 내용들도 참고해 가면서 이 시리즈를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국내에서도 그렇고 전세계적으로도 그렇고 레트로 열풍이 불면서 특히 1980년대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죠. 저 역시 1980년대를 누구보다도 그리워하는 사람 중의 한 명입니다. 아무래도 사람의 일생 중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과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보니까 더더욱 그 시절이 그립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1980년대 대중음악의 정서가 오늘날의 아이돌 음악과도 정서가 잘 맞는 부분이 있습니다. 국내 3대 기획사 중 한 회사의 간판 프로듀서(JYP)가 철저한 80년대 감성의 소유자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기도 하죠.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옛날 사람들끼리 모여서 , 옛날이여!”, “라떼는 말이야~~!!”를 외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오늘날의 10대 청소년과 20대 청년의 시각에서 그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에 대한 호기심을 해소해 주면서 서로 다른 세대 간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싶은 것이 제가 추구하는 목표입니다. 특히나 2020년대에 접어든 오늘날에는 아이돌 열풍과 트로트 열풍이 동시다발적으로 신드롬을 일으키면서 20세기의 전통가요와 21세기의 K-POP이 모두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아 가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대중가요 역사 시리즈를 구상하게 된 계기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저와 비슷한 또래이거나 다섯 살 정도 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주축이 된 세대, ‘X세대들의 역사왜곡을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30, 40대 또는 50대까지의 중년층 연령대에 포함된 사람들, 즉 젊은 꼰대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사람들이 바로 이 X세대입니다.

 

  이들 X세대들은 386세대한테서 온갖 못된 버릇은 다 배웠는데, 이러한 습성은 대중가요에 대한 태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X세대들의 전형적인 특징이 있는데, 1990년대 이전의 대중가요를 부르던 가수들을 전부 다 싸잡아서 뽕짝 가수라고 비아냥대고 오늘날의 아이돌 가수들에 대해서는 맹목적인 적개심을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세대차이라는 것은 존재했지만 1990년대와 오늘날의 분위기는 좀 많이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KBS<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과거에 전성기를 누렸던 가수들이 전설로 출연하고 오늘날 전성기를 누리는 아이돌 가수들이 경연자로 출연하면서 세대 간의 화합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10대 청소년들이나 20대 청년층에서도 과거의 전설과 옛 노래들에 대해서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60대 이상의 어르신들도 오늘날 한류 열풍을 이끌고 있는 K-POP 아이돌 가수들에 대해서 비교적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당시에 신세대라 불렸던 X세대들은 1990년대 이전의 대중음악과 대중가요를 전부 다 뽕짝 가수취급하면서 비아냥대고 강한 적개심을 표출해 왔습니다. 그리고 ROCK 음악이나 힙합 음악과 같은 특정 장르의 음악이 트로트나 발라드보다 우월하다는 삐뚤어진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던 그들이 이제 30대에서 50대에 이르는 중년층이 되면서 본인들이 기성세대의 입장이 되고 나서부터는 오늘날 아이돌 가수들에 열광하는 10대와 20대를 향해 노골적인 적개심을 표출하면서 전형적인 젊은 꼰대의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물론 1990년대 당시의 사회 분위기가 상당히 경직돼 있었고 그 당시의 기성세대들 중에서 꼰대스러운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재계 인사들, 또는 방송, 연예계에서 권력을 쥐고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람들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자기 음악만 열심히 하던 기존의 선배 가수들이나 전통가요의 전설들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까지의 대중음악을 이끌던 가수들이 X세대의 화풀이 대상이 되면서 하루아침에 뽕짝가수취급을 당하고 비아냥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에 와서는 K-POP 한류 열풍을 이끌고 있는 아이돌 가수들이 X세대의 새로운 화풀이 대상이 된 것입니다.

 

  시대가 변하면 새로운 세대의 주역들이 여론의 주도층이 되어야 하는 것이 역사의 자연스러운 순리입니다. 과거의 전통과 유산에 대한 존중도 기반이 된 상태에서 오늘날의 주역을 이루는 세대에 대한 관대한 시선도 함께 가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날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의 여론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주로 30대나 40대의 중년층들이고, 방송사의 PD나 작가들도 386세대와 X세대가 주축이 되어 있다 보니까 오늘날의 10대나 20대의 트렌드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 X세대들은 2020년대를 살면서도 여전히 1990년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X세대들이 자신들만의 폐쇄적인 성을 쌓은 공간이 바로 인터넷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오프라인에서의 대중의 트렌드와 온라인에서의 X세대의 여론이 완전히 딴판입니다. 오늘날 오프라인에서는 20세기의 전통가요와 21세기의 K-POP이 모두 대한민국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존중을 받고 있는데, 인터넷 여론을 주도하고 있는 X세대들만 여전히 딴세상에 살면서 아이돌과 트로트 양쪽에 노골적인 적개심을 표출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들 X세대들이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대중음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도 전형적인 패턴이 있습니다. 1980년대에 청소년들의 사랑을 받았던 조용필, 이용, 전영록, 김수철, 이선희, 김범룡, 송골매(구창모, 배철수)의 존재감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본인들이 신봉하는 언더그라운드의 ROCK 뮤지션들을 의도적으로 띄우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1990년대에 청소년들의 사랑을 받았던 신승훈, 김건모, 김원준, 현진영, HOT, 젝스키스, 조성모의 존재감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본인들이 신봉하는 ROCK 뮤지션과 힙합 뮤지션들을 의도적으로 띄우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기성 가요계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성 가요계를 대표하는 인물인 조용필의 이름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교활한 면모까지 드러내고 있습니다. 항상 조용필의 이름 옆에 자신들이 신봉하는 ROCK 뮤지션이나 힙합 뮤지션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면서 네티즌들을 세뇌시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죠. 아주 비열하기 짝이 없는 역사왜곡 행위입니다.

 

  일부 386세대 평론가 집단과 일부 X세대의 매니아 집단이 오늘날의 방송, 연예계를 장악하고 인터넷 여론을 주도하면서 역사왜곡 작업을 해 온 결과로 인해서 조용필 이전의 한국 대중가요계의 전설들은 아예 존재 자체가 부정당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조용필은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지는 않았지만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사이에 한동안 힘겨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사이에 10대 또는 20대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 중에서는 가왕 조용필마저도 올드한 뽕짝가수취급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2010년대와 2020년대 이후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이 계기가 되어서 옛 전설들의 명예가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세대 간의 화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부모님 또는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와 오늘날의 청소년, 청년 세대 사이에 최소한 대중음악에 있어서만큼은 어느 정도의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조용필 역시 MBC<위대한 탄생>, <나는 가수다>, KBS<불후의 명곡>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오늘날의 10대와 20대에게도 전설로서의 존재감이 되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일부 386세대와 일부 X세대들이 과거 전통가요의 전설들을 싸그리 무시하던 시절이었던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사이에도 유일하게 조용필만큼은 그 존재감을 지우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 이유는 조용필이 도저히 약점을 잡을 수 없는 사기캐릭에 가까운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조용필은 10대 청소년에서부터 60대 이상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들의 사랑을 받은 진정한 국민가수였으며, 다른 작곡가의 노래를 받아서 훌륭하게 부르는 최고의 보컬리스트이기도 하고 본인이 직접 음악을 만드는 최고의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합니다. 트로트 음악에서 ROCK 음악에 이르기까지 전통가요와 현대가요를 모두 능수능란하게 소화해내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역사왜곡을 주도하는 X세대들에게는 뮤지션병이라는 악성 바이러스가 퍼져 있습니다. 오직 싱어송라이터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경향이 있죠. 그런데 이들의 행태에는 치명적인 모순이 하나 있습니다. 정작 가수의 기본인 노래는 못하면서 작곡만 잘하는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뮤지션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가 하면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들에게는 작곡을 못한다고 무시하고 폄하하는 어처구니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가수라는 직업은 문자 그대로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가수에게는 어디까지나 노래가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고 작곡 능력은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이는 국내의 대중음악뿐만 아니라 팝 음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세계적으로 위대한 뮤지션이라는 찬사를 받는 위대한 전설들도 그 기본 바탕은 가수라는 점입니다. ‘가수뮤지션이라는 개념의 차이가 언뜻 이해가 안 가는 분들도 있을 수 있으니, 한번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슈베르트, 하이든은 세계사에 길이 남는 위대한 뮤지션이지만 가수는 아닙니다. 반면에 프랭크 시내트라,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롤링스톤즈는 가수입니다. 이는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김희갑 선생님, 양인자 선생님, 박춘석 선생님, 길옥윤 선생님, 이봉조 선생님, 박시춘 선생님, 김해송 선생님, 손목인 선생님 같은 분들은 정말 위대한 뮤지션이지만 가수는 아닙니다. 반면에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 조용필, 싸이, 방탄소년단은 가수입니다.

 

  오늘날 인터넷에서 X세대들이 신봉하는 ROCK 뮤지션과 힙합 뮤지션들 중에는 직업이 가수이면서 노래는 못하고 작곡만 잘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작곡 하나만 잘해도 뮤지션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거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겠죠.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박춘석 선생님이나 길옥윤 선생님보다도 더 위대한 뮤지션으로 대접받아야 할까요? 그리고, 이렇게 노래는 못하고 작곡만 잘하는 가수들이 조용필과 그 이름이 나란히 거론되면서 뮤지션으로 칭송을 받는 것이 과연 이치에 맞는 일일까요?

 

  조용필은 물론 훌륭한 뮤지션이기도 하지만 뮤지션이기 이전에 가수입니다. 그것도 그냥 가수가 아니라 가수의 왕이라서 가왕 조용필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동안 뮤지션 조용필에게 너무 심취한 나머지 조용필이 가수라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지내지 않았던가요? 제가 한국 대중가요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한국 대중가요의 레전드 중에서도 1위인 가왕조용필에 대한 콘텐츠를 제일 먼저 다루게 되었습니다. 이 콘텐츠에서도 역시 뮤지션조용필보다는 가수왕조용필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것입니다.

 

  조용필이 한국 대중가요를 상징하는 가수의 왕이다 보니까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는 항상 조용필을 기준으로 해서 서술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순리입니다. 따라서 이 콘텐츠에서도 조용필의 가수 인생을 다루는 동시에 조용필 이전의 전설의 가수였던 남인수, 현인,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에 대한 언급도 일부 포함될 것이고 조용필 이후의 슈퍼스타인 싸이와 방탄소년단에 대한 언급도 일부 포함될 것입니다.

 

  ‘가수왕 조용필의 음악 인생과 발자취를 되돌아보는 동시에 20세기의 전통가요에서 21세기의 K-POP을 아우르는 한국 대중가요 전체의 역사를 조명하는 것이 이 콘텐츠의 주요 컨셉이자 취지입니다. 그리고 제가 10, 20대 시절을 보냈던 1990년대와 2000년대의 몹쓸 병폐였던 세대간 갈등뮤지션병이라는 악성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것도 역시 중요한 목표 중 하나입니다. 20세기 한국 대중가요는 전통가요의 역사이고 21세기 한국 대중가요는 케이팝의 역사입니다. 이 모든 역사를 가왕 조용필을 기준점으로 해서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대중가요 가수 중에서는 언더그라운드에서 음악 활동을 하다가 TV 방송에 데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 데뷔 년도를 언더그라운드 시절부터 카운트하는 경우도 있고 TV 방송 데뷔 시절부터 카운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개는 가수 본인의 선택에 따르는 편인데, 조용필의 데뷔 년도는 언더그라운드 시절부터 카운트를 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조사를 해보면 조용필의 데뷔 년도가 1968년이라고 나오는 곳도 있고 1969년이라고 나오는 곳도 있는데, 2018년에 데뷔 50주년이었으니까 계산을 해보면 1968년을 공식적인 데뷔 년도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50년생인 조용필은 1968년 한국 나이로는 19, 만으로는 18세에 애트킨즈라는 언더그라운드 ROCK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데뷔했습니다. 얼마 후인 1969년에는 화이브 핑거스라는 ROCK 밴드의 일원으로 미8군 무대에 데뷔했습니다. 1971년에는 김트리오라는 밴드를 결성했는데, 멤버는 조용필, 김대환, 최이철 이렇게 3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인터넷 검색으로 자료 조사를 하다 보면 간혹 가다가 멤버 이름이 최이철이 아닌 이남이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도 헷갈려서 여러 곳을 자세히 검색해봤는데, 일단 멤버 이름은 최이철이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최이철과 이남이는 유명한 ROCK 밴드 사랑과 평화를 함께했던 멤버였는데, 아마도 그래서 인터넷에 자료를 올려주시는 분들도 두 분의 이름을 종종 헷갈려하는 듯합니다. 고 이남이 님은 1970년대 후반에는 ROCK 밴드 사랑과 평화의 멤버로 활동했고 1980년대에는 솔로 가수로 데뷔해서 그 유명한 <울고 싶어라>를 불렀던 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남이 님은 <내 집이 그립네>라는 노래에서 동요의 가사인 떴다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라는 가사를 불렀는데, 당시 저와 비슷한 또래의 어린이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분이기도 합니다.

 

  다시 조용필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이어나가도록 하죠. 조용필은 데뷔 초창기에는 전문적인 가수라기보다는 기타리스트에 가까웠는데 보컬리스트를 하던 동료 멤버가 군입대를 하는 바람에 보컬을 맡게 되었고, 그것이 가수 인생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조용필 하면 가요계 최고의 슈퍼스타로 너무나도 유명하기 때문에 그냥 데뷔 때부터 막 승승장구하면서 마냥 꽃길만 걸었을 것 같은 이미지로 느껴지지만, 사실은 오랜 무명 시절을 거치며 눈물 젖은 빵을 먹어야 했던 대기만성형 스타라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남진, 나훈아의 시대와 조용필의 시대는 전혀 다른 시대, 다른 세대로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 조용필의 실제 나이와 가요계 데뷔 년도는 남진, 나훈아와도 그다지 많이 차이가 나지는 않습니다. 남진이 1945년생, 나훈아가 1947년생, 조용필은 1950년생입니다. 가요계 데뷔 년도는 남진이 1965, 나훈아가 1966, 조용필은 1968년입니다. 남진과 나훈아가 데뷔 초창기부터 스타덤에 오르며 꽃길을 걸었던 반면에 조용필은 오랜 인고의 시간을 감내한 끝에 30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조용필은 1975년 한국 나이로는 26, 만으로는 25세 때 솔로 가수로 전향하면서 공식 데뷔곡인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했습니다. 본래 이 노래는 황선우 작곡가가 만든 노래로서 1971년에 김해일이라는 가수가 <돌아와요 충무항에>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던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를 아깝게 생각했던 황선우 작곡가가 조용필에게 이 노래를 다시 주면서 제목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수정해서 발표했던 것입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이듬해인 1976년부터 부산에서부터 붐이 일기 시작해서 서울까지 그 신드롬이 확산되며 1976년 최고의 히트곡으로 떠올랐습니다. 당시 재일교포의 고국 방문과 맞물린 시기에 이 노래는 많은 국민들의 심금을 울리며 불후의 명곡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는 수십년의 세월 동안 기나긴 생명력을 유지하며 우리 국민들에게 사랑받고 국민들의 정서 속에 깊이 녹아들어갔던 대표적인 노래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불후의 명곡으로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김정구의 <눈물젖은 두만강>,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있습니다.

 

  만약 조용필이 <돌아와요 부산항에> 단 한 곡만을 남기고 은퇴했다 하더라도 그는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불멸의 전설로 남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성공은 1980년대 이후 시작될 조용필의 진짜 전성기를 앞둔 일종의 예고편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조용필은 당시 가요계를 휩쓸었던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면서 공백기를 맞이했고 쓰라린 좌절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조용필은 여기서 주저앉지 않고 와신상담의 세월을 보내면서 진정한 가수왕으로 거듭나기 위한 수련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한국 나이로는 30세에 접어들었고 만으로는 29세였던 1979년에 조용필은 마침내 가요계에 복귀하면서 TV와 라디오 방송 무대에 공식적으로 데뷔했습니다. 웬만한 가수들은 전성기가 다 지난 황혼기라고 할 수 있는 나이에 조용필의 진짜 전성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조용필은 수십년의 시간이 흐른 21세기에 이르기까지도 여전히 한국 대중가요 역사의 불멸의 가수왕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1979년에 발표된 조용필 1집 앨범의 타이틀곡은 <창밖의 여자>였고 후속곡은 <단발머리>였습니다. 그리고 이 음반에는 조용필의 대표곡인 <돌아와요 부산항에>도 수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조용필 1집 앨범은 조용필의 대표곡들이 총집합되어 있는 음반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창밖의 여자>는 이듬해인 1980년에 방영된 라디오 드라마의 주제가로 불리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후속곡인 <단발머리>도 연달아 히트하면서 조용필은 1980년 연말 시상식에서 <MBC 10대가수 가요제>최고 인기가수<KBS 가요대상>남자가수 대상을 수상하면서 마침내 가수왕에 등극했습니다. 1980년 당시의 최대 히트곡은 <창밖의 여자>였고 시간이 많이 흐른 오늘날에는 <단발머리>가 조용필의 초창기 히트곡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 그때 당시 청소년기 또는 청년기를 보냈던 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조용필이 10대 소녀들에게 사랑받는 최고의 오빠로 등극하기까지의 과정이 꽤나 드라마틱했다고 합니다. 1979년에서 1980년 사이에 당시 청소년들이 많이 보는 하이틴 잡지에서는 가수들의 인기 순위를 조사해서 내보냈었는데 송창식이 꽤 오랜 기간 동안 1위를 독주하고 있다가 1980년 연말이 가까워오면서 조용필이 10위권에 진입해서 차츰차츰 순위가 올라가면서 결국에는 송창식을 제치고 1위까지 올라갔다고 합니다.

 

  조용필이 가수왕으로 등극하게 되면서 1980년대 가요계에서는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는데, 10대 청소년층과 20대 청년층의 세계관에서 해석한 세대교체 구도와 남녀노소 모든 연령대의 국민들의 세계관에서 해석한 세대교체 구도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조용필 이전 청년 문화의 아이콘으로 군림했던 인물은 송창식이었는데 조용필의 등장과 함께 청소년, 청년 문화의 아이콘은 송창식에서 조용필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조용필에게 청년 문화의 아이콘 지위를 물려준 뒤에도 송창식은 1980년대 초중반까지도 꽤 오랜 기간 동안 건재하게 활약하면서 가요계의 전설 중 한 명으로서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30대 이상의 중장년층까지 포함해서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세계관에서 바라본 가요계의 판도는 남진, 나훈아의 시대에서 조용필의 시대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조용필의 시대가 개막한 이후에도 중장년층 어르신들에게는 여전히 기존의 가요계 전설이었던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가 건재하게 자리를 지켜오고 있었습니다. 이후 수십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 조용필은 가요계의 대표적인 전설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조용필 이전 시대의 가요계 전설들도 정말 대단한 분들이기는 하지만 10대 청소년들의 관심권에서는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한 상태였던 반면에 조용필은 10대 청소년부터 60대 이상 어르신들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모든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진정한 의미의 국민가수이자 가수의 왕으로 등극했고, ‘가수의 왕이라는 뜻의 가왕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1980년대에 조용필의 시대가 개막한 이후 당대의 10대 청소년들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가수들은 조용필, 이용, 전영록, 김수철, 이선희, 김범룡, 송골매(구창모, 배철수) 등이 대표적이었고, 1970년대부터 활약해왔던 혜은이와 이은하도 1980년대 초중반까지는 여전히 건재하게 활약하며 조용필의 라이벌 그룹의 일원으로 자리를 지켜오고 있었습니다.

 

  1980년부터 1986년까지 7년 동안 조용필은 가요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1인 독주 시대를 열었습니다. 당시 양대 방송국의 연말 시상식에서 조용필은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최고 인기가수를 통산 6회 수상했고 <KBS 가요대상>에서 남자가수 대상을 통산 5회 수상했습니다. 1986년에 신설된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도 조용필은 1986년 제1회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당시 양대 방송국의 시상식 중에서도 <MBC 10대가수 가요제>196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당대 최고의 권위를 가진 시상식으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해마다 <KBS 가요대상>1230일에 개최됐고, <MBC 10대가수 가요제>1231일에 개최되면서 보신각 종소리와 함께 새해를 맞이하고 가수왕을 뽑으며 피날레를 장식해 왔습니다. 따라서 MBC에서 가수왕에 등극하는 것은 한 해를 결산하는 피날레 무대에서 대관식을 치르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대상의 공식적인 명칭은 최고 인기가수였고 비공식적으로는 가수왕이라고 불렸습니다. 가수들의 축제에서 최고의 인기가수로 선정된 가수는 가수의 왕이 된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최고 인기가수라는 명칭이야말로 가요대상의 본질에 가장 부합하는 명칭이었습니다. 가수들의 축제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가수에게 가수왕대관식을 치르게 해준다는 매우 뜻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조용필은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최고 인기가수를 통산 6회 수상하며 역대 최다 수상자로 등극했습니다. 이미자와 남진이 통산 3회 수상으로 역대 공동 2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혜은이와 주현미가 통산 2회 수상으로 역대 공동 4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용필은 1980년부터 1986년까지 7년 동안 가요대상 트로피 15개 중에 12개를 독차지하는 위용을 과시했습니다. 나머지 3개의 트로피는 이용, 김수철, 전영록이 각각 한 차례씩 차지했습니다.

 

  조용필의 수많은 불멸의 히트곡들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노래들을 살펴보자면 우선 1980년에는 <창밖의 여자><단발머리>가 있었습니다. 1981년에는 <고추잠자리>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무려 24주 연속 가요 순위 1위를 기록했습니다. 이 부문의 역대 기록에서는 1964년에 이미자가 <동백아가씨>35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며 통산 1위 기록을 세웠고 1981년에 조용필은 <고추잠자리>24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며 통산 2위 기록을 세웠습니다.

 

  1982년에는 <못 찾겠다 꾀꼬리>KBS <가요톱텐>에서 10주 연속 1위의 대기록을 달성했습니다. 이때 조용필이 너무 오랫동안 독주를 하는 바람에 KBS <가요톱텐>에서는 <골든컵>이라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서 5주 연속 1위를 하면 순위에서 제외시키는 규정을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1982년에는 가사 첫 소절의 기도하는~ 꺄악!”으로 유명한 <비련>도 대표적인 히트곡 중의 하나였습니다.

 

  오늘날의 10대와 20대의 궁금증 해소를 위해서 20세기 당시의 텔레비전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 대한 부연설명을 덧붙이자면 1970년대까지는 TBC 방송국의 <쇼쇼쇼>라는 프로그램이 최고 권위의 프로그램이었고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KBS <가요톱텐>이 최고 권위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요톱텐>의 후속 프로그램인 <뮤직뱅크>는 오늘날 최고 권위의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MBC에서는 1980년대 후반에 <쇼 네트워크>라는 프로그램이 있었고 1990년대 초반에는 <여러분의 인기가요>라는 프로그램이 있었고 1990년대 중반에는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쇼 네트워크><여러분의 인기가요>에는 골든컵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10주 이상 연속으로 1위를 해도 제한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에는 일시적으로 MBC의 순위 프로그램이 KBS <가요톱텐>보다 더 권위가 높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의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에서는 3주 연속 1위를 하면 순위에서 제외시키는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는 제도를 도입했고 이때부터 MBC의 순위 프로그램은 KBS의 순위 프로그램보다 권위가 떨어진다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1983년에는 <나는 너 좋아>, <친구여>가 가장 대표적인 히트곡이었습니다. 1983<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최고 인기가수를 수상할 당시의 수상곡은 <나는 너 좋아>였고 시간이 한참 흐른 오늘날까지도 꾸준하게 사랑받고 있는 노래는 <친구여>입니다. 1984년에는 <눈물의 파티>가 최대 히트곡이었습니다. 그리고 1985년에는 그 유명한 <여행을 떠나요>가 나왔습니다. 오늘날의 10대부터 30대까지의 젊은층에서는 조용필의 노래 중 <여행을 떠나요>가 가장 사랑받고 있습니다. 1986년에는 <허공>, <그 겨울의 찻집>, <킬리만자로의 표범>으로 중장년층 어르신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히트곡들이 탄생했습니다.

 

  가요계에서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서 가수왕으로 군림하던 조용필에게도 한때 라이벌의 존재는 있었습니다. 조용필의 앞에 등장한 최초의 라이벌은 이용이었습니다. 1982년에 이용은 잊혀진 계절이라는 불멸의 히트곡을 탄생시키면서 연말 시상식에서 조용필과 각축을 벌였습니다. <KBS 가요대상>에서는 조용필이 남자가수 대상을 수상했지만, 한 해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는 이용이 조용필을 제치고 최고 인기가수를 수상하는 이변을 일으켰습니다.

 

  이듬해인 1983년에 청소년들이 많이 구독하는 한 잡지에서는 가수들의 인기 순위를 조사했는데 조용필이 다시 1위에 오르고 전영록이 이용을 제치고 2위에 올랐습니다. 조용필, 이용, 전영록은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면서 팬클럽들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 청소년기를 보냈던 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조용필, 이용, 전영록이 빅3로 불렸다고 합니다. 라이벌 구도 자체에 포커스를 맞춰서 이야기할 때는 조용필과 이용의 라이벌 구도가 더 자주 언급되는 경향이 있고, 1980년대 가요계의 양대산맥에 포커스를 맞춰서 이야기할 때는 조용필과 전영록의 양대산맥 체제가 더 자주 언급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록 라이벌또는 양대산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절대강자인 조용필이 1인 독주 체제를 굳건하게 유지하는 가운데, 이용과 전영록이 2인자 다툼을 벌이는 구도였습니다.

 

  당시 최고 권위의 시상식이 <MBC 10대가수 가요제>였고 조용필의 동시대 경쟁자 중에서 조용필을 제치고 최고 인기가수를 수상한 인물은 이용이 유일했습니다. 이 때문에 1982<MBC 10대가수 가요제>의 엔딩 장면은 두고두고 역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한편 1984년에는 김수철이 <못다핀 꽃 한송이>로 돌풍을 일으키면서 <KBS 가요대상>에서 조용필을 제치고 남자가수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밖에도 조용필의 독주 체제에 도전장을 낸 가수들이 몇 명 더 있었습니다. 1984<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대상인 최고 인기가수는 조용필이 수상했지만 최고 인기가요에는 이선희의 <J에게>가 선정됐습니다. 1985년에는 연말 가요대상을 놓고 조용필, 김범룡, 구창모가 치열한 3파전을 벌였습니다. 1985<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최고 인기가수는 조용필이 수상했지만 최고 인기가요에는 김범룡의 <바람바람바람>이 선정됐습니다. 1986<KBS 가요대상>에서는 전영록이 조용필을 제치고 남자가수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1980년대 당시 <MBC 10대가수 가요제>는 해마다 수상자의 명단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는 가운데에서도 조용필과 전영록 두 사람은 해마다 단골손님으로 꾸준히 등장하며 본상에 해당하는 ‘10대가수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때문에 조용필과 전영록을 양대산맥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1인자와 2인자 사이에는 너무나도 큰 격차가 있었고, 대상은 항상 1인자인 조용필의 몫이었습니다.

 

  1987년에 조용필은 더 이상 가요대상을 수상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당시 가요계에서는 연말 가요대상 시상식에서 1인자인 조용필이 대상을 수상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용필이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는 2인자인 전영록이 대상을 수상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도 역시 있었습니다. 1987년 연말 시상식에서는 1인자 조용필이 자리를 비우게 되면서 영원한 2인자였던 전영록이 연말 가요대상을 수상했습니다.

 

  1987<KBS 가요대상>에서는 처음으로 남녀 통합 대상을 시상하기 시작했는데, 전영록이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1987년에 MBC에서는 시상식이 아닌 축제 형식의 <MBC 가요대제전>이 개최되었습니다. 공식적인 시상식이 거행되지는 않았지만, 1987년에 MBC에서는 전영록이 최고 인기가수에 선정되었고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최고 인기가요에 선정되었습니다.

 

  그 시절의 10대 청소년들에게는 조용필, 이용, 전영록, 김수철, 이선희, 김범룡, 구창모가 당대를 풍미한 가장 대표적인 아이돌 스타였습니다. 1980년대 초반에는 조용필, 이용, 전영록이 빅3 구도를 형성했고 1980년대 중반에는 조용필, 전영록, 김수철이 빅3 구도를 형성했으며 1980년대 후반에는 조용필, 전영록, 이선희가 빅3 구도를 형성했습니다.

 

  조용필은 일본에도 진출해서 높은 인기를 누렸던 원조 한류스타이기도 합니다. 조용필은 일본의 연말 가요 축제인 <홍백가합전>에 여러 차례 출연했는데, 이는 보아와 동방신기보다도 약 10년에서 15년 정도 앞선 시기에 이룬 성과였습니다.

 

  조용필은 1988년에 <서울 서울 서울>을 발표했는데, 이 노래는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당시에 널리 사랑받았습니다. 이 앨범에는 그 유명한 <모나리자>도 같이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1989년에는 작곡가 김희갑, 작사가 양인자 콤비의 작품인 <Q>를 히트시켰고 1990년에는 <추억 속의 재회>를 히트시켰으며 1991년에는 <>을 히트시켰습니다.

 

  조용필은 때로는 본인이 직접 작사, 작곡을 하기도 했고, 때로는 당대 최고의 작곡가, 작사가였던 김희갑 선생님, 양인자 선생님 부부의 곡을 받아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싱어송라이터보컬리스트양쪽 부문 모두에서 조용필은 빼어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조용필은 가요계의 큰형님답게 수많은 선후배, 동료 가수들과 인연을 맺어왔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대표적인 가수들은 패티김과 신승훈이었습니다. 조용필이 가장 존경하는 선배가 패티김이고 가장 아끼는 후배가 신승훈이라고 합니다.

 

  조용필은 패티김과 오랜 세월 동안 교류하며 우정을 나눴고 2013년 패티김의 은퇴투어 콘서트에서는 직접 영상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초반에 조용필은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직접 신승훈을 소개하기도 했고, 자신의 콘서트에 신승훈을 게스트로 초청해서 <미소 속에 비친 그대>를 듀엣으로 함께 부르기도 했습니다. 조용필은 신승훈의 데뷔 초창기부터 그 장래성을 꿰뚫어보고 공식적으로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하기도 했습니다.

 

  조용필은 1987년부터 가요대상 수상을 거절했지만, TV에는 여전히 출연을 하고 있었고 히트곡도 꾸준히 배출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1992년 이후부터는 아예 TV에서도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라이브 콘서트 공연 활동에 매진하기 시작했습니다. 1990년대 당시에는 당대의 신세대라 불렸던 X세대들이 1990년대 이전의 전통가요 가수들에게 맹목적인 적개심을 표출하면서 뽕짝가수라고 매도하던 시절이었고, 가수의 왕이라는 조용필조차도 한동안은 힘겨운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조용필에게도 한때 힘겨운 시기가 있었지만, 조용필은 이를 극복하고 자신의 공연장으로 서서히 팬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용필이 음반을 매년 발표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1990년대까지는 비교적 꾸준하게 신곡을 발표하면서 음악적인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1997년에 조용필은 <바람의 노래>를 발표했는데, 이 노래는 중장년층의 정서를 파고들면서 1991년의 <> 이후로 오랜만에 준수한 실적을 올린 히트곡으로 등극했습니다.

 

  세기말이었던 1998년에서 1999년 사이에는 ‘20세기 최고의 가수를 뽑는 설문조사가 유행했었습니다. 다양한 기관에서 대중 또는 전문가를 상대로 다양한 조사를 실시했고 그 순위도 조사 기관마다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이러한 컨셉의 설문조사들 중 가장 유명한 조사는 1999년에 MBC가 한국갤럽에 의뢰해서 조사한 ‘20세기 한국인의 노래라는 제목의 설문조사였는데, 이 조사에서는 조용필이 1, 나훈아가 2, 이미자가 3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밖에도 비슷비슷한 컨셉의 설문조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거의 대부분의 조사에서 조용필이 1위를 차지했고 이미자와 나훈아가 2위 다툼을 벌이는 구도였습니다. 그리고 각 설문조사마다 10대와 20대의 참여 비율이 조금씩 차이가 있었는데, 이에 따라 4위부터 20위까지의 순위는 각 조사마다 크게 요동쳤습니다. 가수 순위를 매기는 조사 말고도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은 노래의 순위를 매기는 조사도 함께 진행됐는데, 거의 대부분의 조사에서 김정구의 <눈물젖은 두만강>,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였습니다.

 

  이런 종류의 설문조사는 순위 자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추세나 경향 같은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날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설문조사들은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사이에 실시된 조사들이 대부분이고 따라서 1990년대에 전성기를 누린 가수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구도로 짜여져 있습니다. 특히 1998년에서 1999년 사이에 진행된 조사들은 딱 그 시점에서 인기 있었던 가수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구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의 조사에서 조용필, 이미자, 나훈아가 선두권을 형성했다는 것은 전설의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입니다.

 

  물론 이것도 정말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어가자면, 1940년대와 1950년대의 가요 황제였던 남인수와 현인의 전성기를 목격했던 분들은 오늘날 생존해 계신 분들이 얼마 안 되기 때문에 설문조사 순위에서도 남인수와 현인에게 너무 불리하다는 문제점이 있기는 합니다. 그렇기는 해도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의 가요계 역사를 목격하셨던 어르신들이 아직까지는 많이 생존해 계시기 때문에 이미자, 나훈아, 조용필로 대표되는 가요계 전설들의 역사를 꾸준히 증언을 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조사 기관에 따라서는 이미자와 나훈아도 순위가 아래로 떨어지는 경우가 간혹 있었지만 조용필만큼은 언제나 흔들림 없이 1위 자리를 지켰습니다. 1998년과 1999년 사이에 MBC의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에서는 ‘20세기 최고 가수 조용필을 주제로 한 컨셉의 특집 방송을 몇 차례 내보냈고, 1999<KBS 가요대상> 시상식에서는 ‘20세기 최고 가수 조용필의 특별 공연 무대가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이미 서두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1990년대 당시에는 이전 시대였던 1980년대까지의 가요계의 전설들의 유산을 싸그리 부정해 버리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가수의 왕이라는 조용필마저도 한물간 뽕짝가수취급을 당하며 힘겨운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조용필이 ‘20세기 최고 가수로 등극해서 대관식을 치르는 듯한 컨셉의 방송이 MBCKBSTV와 라디오를 통해서 방영되면서, 다시는 그 어느 누구도 조용필의 유산을 함부로 묻어버리려는 시도를 할 수 없게 만드는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조용필은 꾸준히 음악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여전히 TV 방송 출연은 거의 하지 않았고 라이브 콘서트 위주의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2003년에는 오랜만에 음반을 발표했는데, 이 앨범에 수록된 노래 중에서 <태양의 눈>은 영화 <실미도>OST로 제작된 노래로서, 젊은 세대에게도 상당한 인기를 얻었습니다. 2008년에는 조용필의 데뷔 40주년 기념 콘서트를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가요계와 방송, 연예계에서 옛 전설들의 유산을 존중하는 문화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그 계기가 된 프로그램은 MBC<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박정현이 조용필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를 부르고 임재범이 윤복희의 <여러분>을 부르면서 10, 20대 젊은층에게 옛 노래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과거 전설들의 유산이 존중받기 시작했습니다.

 

  2011년부터는 KBS에서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이 출범했습니다. 방송 초창기에는 MBC<나는 가수다>를 모방했다는 따가운 시선도 일부 있기는 했지만,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과거의 가요계 원로들이 전설로 등장하고 오늘날 현역으로 전성기를 누리는 아이돌 가수들이 경연자로 참여해서 전설들의 노래를 부르면서 세대 간의 화합을 주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오늘날에는 10대 청소년들과 20대 청년들도 과거 전설들의 노래를 찾아서 듣기 시작하고 60대 이상 어르신들도 오늘날의 아이돌 가수들을 향해서 따뜻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2011년에 MBC의 오디션 프로그램인 <위대한 탄생>에서는 마침내 조용필의 특별 출연이 성사되었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다시피 위대한 탄생은 조용필의 밴드의 명칭이기도 하죠. 이날 특집에서는 경연 참가자들이 조용필의 전설의 히트곡들을 노래하는 미션이 방송되었는데, ‘위대한 탄생밴드의 멤버들이 경연 참가자들의 무대에서 직접 연주까지 해주는 영광스러운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조용필은 방송에 직접 출연해서 경연 참가자들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2012년에는 MBC의 경연 프로그램인 <나는 가수다>에서 조용필의 역사적인 특별 출연이 성사되었습니다. 이날 경연 참가자들은 조용필의 전설적인 노래들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해서 부르는 무대를 가졌습니다. 조용필은 방송에 직접 출연해서 인순이, 장혜진, 조관우, 바비킴, 자우림, 윤민수, 김경호 등의 참가자들을 격려했습니다.

 

  2013년에 조용필은 무려 10년만에 새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이번에 조용필은 젊은 세대의 감각에 맞추기 위해서 외국인 작곡가들을 등용하는 파격을 감행했습니다. 새 앨범의 타이틀곡은 <헬로>였고 온라인 음원 사이트에서는 <바운스>를 먼저 선공개했습니다. 사실은 타이틀곡에 대해서 젊은층이 얼마나 호응을 해줄지 반응을 엿보기 위해서 먼저 맛배기식으로 내놓은 곡이 <바운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운스>는 공개되자마자 젊은층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받으며 음원 사이트 1위에 올랐습니다. 당시 젊은 세대에게도 조용필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유명한 전설이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과거의 인물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운스>를 들었던 젊은 세대들은 조용필이 오늘날의 트렌드에 전혀 뒤처지지 않는 세련된 노래를 들고 나왔다는 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조용필의 유산은 과거형에 박제되지 않고 현재진행형 전설로 그 권위를 이어나가게 되었습니다.

 

  한편 2013년에는 1년 전 월드스타로 떠올랐던 싸이가 <젠틀맨>을 발표하면서 컴백했던 시기이기도 했는데, 조용필과 싸이가 컴백해서 맞대결을 펼치게 된 것을 각종 언론 매체에서 특종 기사로 앞다투어 보도했습니다. 특히 조용필이 싸이를 제치고 음원 차트 1위에 올랐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빌보드> 잡지에 조용필이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조용필은 컴백 쇼케이스 인터뷰에서 이에 대한 질문을 받자 싸이 덕분이라며 쿨하게 칭찬하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2013년에 조용필은 싸이의 공연장에 직접 화환을 보내서 축하하기도 했고, 싸이는 조용필에게 진심어린 감사와 존경의 표시를 담은 인사를 하며 화답했습니다. 20세기의 슈퍼스타와 21세기의 슈퍼스타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아름다운 광경이었습니다. 2013년 연말에는 케이블 TV의 가요 시상식인 <MAMA>에 조용필의 출연이 성사되었고, 2013년 한국갤럽에서 발표한 연도별 10대가수 순위에서는 조용필이 1, 싸이가 2위에 올랐습니다.

 

  2018년에 조용필은 데뷔 5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조용필의 데뷔 50주년을 맞아서 방송, 연예계의 유명인사들이 조용필에게 릴레이로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현재 조용필의 유튜브 채널에서 볼 수 있는 <조용필 Cho Yong Pil "50 & 50"> 릴레이 이벤트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은 안성기, 태양, 유재석, 이서진, 유희열, 이승기, 장윤주, 이선희, 배철수, 아이유, 이승엽, 송강호, 방탄소년단, 이덕화, 손현주, 트와이스, 나영석, 박정현, 신성우, 김경호, 김제동, 신승훈, 김구라, 황치열, 김이나, 전현무, 김향기, 동방신기, 윤도현, 워너원, 세븐틴, 싸이입니다.

 

  조용필이 데뷔 50주년을 맞은 2018년에는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200> 차트에서 1위에 오르는 사건이 있었던 해이기도 했습니다. 조용필은 인터뷰에서 충격이다. 전에 싸이가 빌보드에 올랐을 때도 너무 놀랐다. 이런 일이 또 있을까 했는데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저뿐 아니라 모두 깜짝 놀랐다.”라고 발언하며 방탄소년단을 극찬했습니다.

 

  그리고 조용필은 방탄소년단의 콘서트에 화환을 보내서 축하 메시지를 전했고 방탄소년단은 조용필에게 진심어린 감사와 존경을 담은 인사로 화답했습니다. 조용필은 2013년에도 싸이와 이같은 교류를 한 데 이어서 2018년에는 방탄소년단과도 같은 방식으로 교류하며 20세기 한국 대중가요 최고의 전설과 21세기 최고의 슈퍼스타들 사이에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조용필의 데뷔 50주년을 축하하는 릴레이 메시지에는 싸이와 방탄소년단도 참여했습니다.

 

  2018년에 조용필은 데뷔 50주년을 맞이해서 마침내 KBS<불후의 명곡> 출연이 성사되었습니다. 이로써 <불후의 명곡>에서는 2017년 이미자의 출연이 성사된 데 이어서 2018년 조용필의 출연으로 인해 한국 대중가요의 끝판왕이 등장함으로 인해서 마지막 하나 남은 퍼즐 조각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불후의 명곡> 조용필 특집은 3부작으로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조용필은 방송에 직접 출연해서 경연에 참가한 후배 가수들을 격려하고 팬들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은 아주 소중한 프로그램입니다. 제가 10, 20대 시절을 보내던 1990년대와 2000년대 당시만 해도 386세대 평론가들과 X세대 매니아층의 주도 하에 1980년대까지의 가요계의 유산을 깡그리 묻어버리려는 추악한 시도가 있었는데, <불후의 명곡>을 통해서 20세기 전통가요의 전설들과 21세기 케이팝의 슈퍼스타들이 한데 모여 세대 간의 화합을 주도하고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와 전통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뜻깊은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뜻깊은 무대는 역시 가수의 왕조용필의 출연으로 그 화룡점정을 찍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인터넷에서는 386세대 평론가들과 X세대 매니아층이 주도하는 추악한 역사왜곡이 멈추지 않고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일반적인 대한민국 국민들의 상식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해석으로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언더그라운드의 ROCK 뮤지션과 힙합 뮤지션들이 절대적인 추종의 대상입니다. 이들은 커뮤니티에서 자기들끼리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터넷에서 온갖 90년대 편향적인 설문조사 결과를 들고 와서 어그로를 끌며 역사왜곡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각 대학의 대중음악사를 강의하는 학과에서는 386세대 평론가들과 X세대 매니아층이 주도하는 역사왜곡 자료를 아예 교재로 사용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를 설명하는 방식은 아주 가관입니다. 1970년대 가요계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남진, 나훈아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빼놓고 한대수의 귀국이 한국 대중음악사를 뒤흔든 역사적 사건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용필 이전의 가요계 전설들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고 가수왕 조용필마저도 심하게 평가절하된 설문조사인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이 마치 성경이나 코란과도 같은 신봉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는 일반적인 대한민국 국민들의 상식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습니다. 대한민국 대중가요의 역사는 윤심덕의 <사의 찬미>, 이애리수의 <황성옛터>,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과 같은 초창기 불멸의 가요들로 그 초석을 다져왔으며 1940년대에는 남인수와 백년설이라는 양대산맥이 존재했고 1950년대에는 남인수와 현인이라는 양대산맥이 존재했습니다. 특히 1940년대와 1950년대의 남인수와 현인은 당대의 가요 황제로 군림했습니다.

 

  1960년대는 이미자와 패티김의 시대였고 1970년대는 남진과 나훈아의 시대였으며 1980년대는 조용필의 1인 독주 시대였습니다. 1970년대 남진,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와 1980년대 조용필의 슈퍼스타 등극은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상식으로 생각하는 한국 대중가요 역사 최대의 사건입니다.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 조용필 5인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어르신들에게 존경받는 가요계 최고의 전설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김정구의 <눈물젖은 두만강>,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수십년의 세월 동안 생명력을 이어온 불멸의 히트곡으로 문자 그대로 한국인의 노래입니다.

 

  1990년대 이후의 가요계는 특정인의 1인 독주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 혼전의 시대였습니다. 10대부터 30대까지의 젊은 세대에서는 신승훈, 김건모, 서태지가 혼전을 벌이는 3파전 구도였고 40대 이상 중장년층은 송대관, 태진아가 정상을 다투는 영역이었습니다. 2000년대까지도 여전히 특정인의 1인 독주는 결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마침내 유튜브라는 매체를 통해서 싸이와 방탄소년단이 전세계로 뻗어나가는 21세기의 K-POP을 주도하는 최고의 슈퍼스타로 등극했습니다. 그리고 2020년대에 접어든 오늘날에는 아이돌과 트로트 음악이 동시다발적으로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고 전통가요와 현대가요가 모두 존중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2013년에 조용필과 싸이가 공존하고 2020년에 나훈아와 방탄소년단이 공존하는 현상을 직접 목격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과거 가요계 전설들이 재조명되는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평론가라 불리는 사람들을 싸잡아서 비판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임진모 씨나 강헌 씨 같은 분들은 과거 전통가요에서부터 오늘날의 케이팝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는 균형 잡힌 시각의 설명을 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아예 박성서 씨처럼 전통가요의 역사를 진지하게 파고들어서 복원을 해주는 분도 계시고 이동순 교수님처럼 전통가요의 역사를 친절하게 해설해주는 분도 계시고 최규성 씨처럼 우리 가요계 역사의 소중한 음반들을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에 힘쓰고 계신 분도 있습니다.

 

  저는 대중음악과 관련된 산업에 직접적으로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저분들처럼 그렇게 스케일이 큰 작업을 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한국 대중가요 역사를 제대로 조명하기 위해서는 전설들을 100, 200명이든 그 이상이든 열심히 소개해야 마땅하겠지만 저 혼자 그 작업을 하기에는 너무 힘에 부치기 때문에 저의 힘이 닿는 선에서 핵심인물 50명만 먼저 소개하기로 결심했고, 그 첫 번째 인물로 가수의 왕조용필을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20세기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는 전통가요의 역사이고 21세기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는 케이팝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20세기와 21세기의 역사를 연결해줄 수 있는 인물은 역시 조용필이 그 기준점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조용필이 가수의 왕이라는 것이 아주 당연한 상식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우리가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것을 소홀히 하면 후대에 역사왜곡이 되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의 가요계 황제였던 남인수와 현인을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합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분들 중 생존해 계신 분들이 얼마 안 계시기 때문에 그 시대를 증언해줄 사람들이 점점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는 아주 슬픈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2020년대에 접어들면서 조명섭이라는 신예 트로트 가수의 등장과 함께 1950년대의 현인과 1940년대의 남인수의 존재가 다시 소환되고, 송가인, 임영웅의 등장과 함께 이미자, 남진, 나훈아의 존재가 다시 소환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과거 역사의 유산이 후대에 끊임없이 이어질 수 있도록 역사를 치열하게 기록하고 보존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조용필의 전성기가 불과 10년도 채 지나지 않았던 1990년대에 조용필의 유산을 깡그리 묻어버리려는 일부 386세대 평론가들과 X세대 매니아들의 추악한 시도를 목격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조용필에 대한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고 보존하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역사왜곡 시도는 또다시 반복될 수 있습니다. X세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저는 이 문제를 굉장히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데, 1980년대를 살아온 어르신분들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역사를 치열하게 기록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유튜브라는 매체가 아주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유튜브를 통해서 과거 가요계 전설들의 활동이 담긴 영상들이 온라인 공간에 보존되면서 소중한 역사 자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같은 사람들은 비록 그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우리가 보고 들은 역사를 열심히 기록하고 증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블로그나 유튜브와 같은 매체들은 이러한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데 필요한 아주 소중한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대중가요 역사의 불멸의 전설이자 가수의 왕 조용필을 소개하는 것으로 제가 기획하는 이 시리즈도 첫 스타트를 끊었습니다. 이 콘텐츠를 계기로 해서 온라인 공간에서도 20세기 전통가요의 역사와 21세기 케이팝의 역사를 치열하게 기록하고 보존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났으면 하는 것이 저의 간절한 바램입니다.

 

 

{출처 : 위키백과, 나무위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그 외 신문 기사, 텔레비전 방송, 인터넷 뉴스 기사 참고}

 

 

(네이버 블로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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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1위 – 조용필

[[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1위 – 조용필 ]]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시리즈, 그 첫 번째 시간. 한국 대중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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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링크)

www.youtube.com/watch?v=lsNignzLLpY

 

www.youtube.com/watch?v=oF_J98JhGc4

 

www.youtube.com/watch?v=hU5e9t_l5H8&t=1019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