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2위 – 남인수

JOHN CENA 2020. 12. 29. 22:07

[[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2남인수 ]]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시리즈, 그 두 번째 시간.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2, 남인수. 이번 시간에는 1940년대와 1950년대를 주름잡았던 최고의 슈퍼스타이자 가요 황제 남인수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보려 합니다.

 

   남인수는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광복 직전과 직후 시대를 주름잡았던 인물이며, 조용필과 더불어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조용필 하면 남녀노소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반면에, 남인수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오늘날처럼 체계적으로 역사를 정리하고 기록하는 문화가 자리잡지 못했었기 때문에 소중한 역사 기록물들이 많이 소실되면서 후대에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1930년대에서 1950년대에는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와 같은 방송 매체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던 시대이기도 하고, 오늘날처럼 대중가수들을 위한 시상식 무대를 마련해서 예우해주는 문화도 없었고, 평론가들의 지원사격을 전혀 받지 못했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사실 제가 이 콘텐츠를 제작하면서 자료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7080 시대의 가수들이나 90년대 가수들에 대한 자료는 인터넷 공간에서 무궁무진하게 넘쳐나기 때문에 자료를 찾고 정리하는 데 별로 어려움이 없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에서 1950년대 사이에 활동했던 원로 가수들에 대한 자료를 찾기 위해 인터넷에서 아무리 검색을 열심히 해도 자료를 찾기가 너무나도 힘이 듭니다.

 

   위키백과나 나무위키에서조차도 수박 겉핥기 식으로 히트곡의 목록을 단순 나열하는 데 그치고 있습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검색을 통해서 과거 신문기사를 검색해봐도 1950년대 이전의 자료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유튜브 업로드를 위한 콘텐츠를 제작하고 싶어도 최소한의 분량을 뽑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남인수라는 원로 가수가 대한민국의 대중가요 역사에서 어떠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고,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제대로 다루고자 한다면 조용필에게 쏟았던 관심과 정성에 못지않게, 어쩌면 그 이상의 정성을 기울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지만 원로 가수들에 대한 기록물 자체가 너무 부실하다 보니까 그저 대표적인 히트곡들의 목록을 쭉 나열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서 좀 아쉽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가능한 범위 내에서는 최선을 다해볼 생각입니다.

 

   위키백과나 나무위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조차도 자료를 찾기가 너무 어렵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개인 블로그나 카페, 유튜브 등을 검색해보기도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남이 올려놓은 소중한 자료를 무단으로 가져다 쓸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특히나 요즘 같은 시대에는 저작권 문제나 표절 시비 같은 부분이 유난히 더 민감한 시기이기도 하죠.

 

   이런 상황에서는 대중가요의 고대사와 원로 가수들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파고들어서 연구한 분들의 회고록 같은 것을 참고한 뒤, 그 출처를 밝히고 인용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소중한 역사 기록물들을 남겨주신 분들이 몇 분 계셨는데요. 이 콘텐츠를 제작하기 위한 자료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도움이 된 기록물은 이동순 교수님과 작사가 정두수 님의 회고록이었습니다.

 

   이동순 교수님이 <논객닷컴>이라는 인터넷 언론 매체에 기고한 <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라는 칼럼 시리즈가 있는데, 여기에서 가요 황제 남인수의 일대기에 대한 기록을 비교적 자세하게 정리해 놓았습니다. 오히려 위키백과나 나무위키보다도 훨씬 더 상세하게 역사를 기록해놓은 매우 소중한 자료입니다.

 

   작사가 정두수 님이 <문화일보>에 기고한 <작사가 정두수 회고록: 가요따라 삼천리>라는 회고록 시리즈도 있습니다. 1959년에는 당대 가요계의 두 슈퍼스타, 남인수와 현인의 전설적인 노래 대결 무대가 있었습니다. 이 일화는 그 시절을 목격했던 분들의 증언에 의해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작사가 정두수 회고록>에서는 1959년에 남인수와 현인의 노래 대결 무대가 펼쳐졌던 당시의 상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동순 교수님과 정두수 작사가님의 회고록을 토대로 해서, 우선은 남인수라는 가수의 일대기와 약력에 대해서 조사한 내용을 먼저 간략하게 서술하고자 합니다. 남인수는 흔히 경남 진주 출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출생지는 경남 하동이었습니다. 1918년생인 남인수 선생은 처음 출생 당시의 본명은 최창수였는데, 부친의 사후에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진주 강씨 문중에 들어가게 되면서 이름이 강문수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남인수 선생의 본명은 강문수이고, 가수로 데뷔한 후에 남인수라는 예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남인수 선생의 가수 데뷔 이전의 행적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고 몇 가지 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내용은 어린 시절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전구 공장, 또는 제철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었다는 내용입니다. 10대 후반에는 어느 제철공장의 노동자로 취직했는데, 쇳물을 다루는 중에도 일본의 엔카를 곧잘 따라부르며 주변 노동자들에게 가수 칭호를 듣는 등, 연예인으로 발돋움할 만한 끼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1936년에 남인수는 시에론레코드사에서 <눈물의 해협>이라는 노래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가요계에 데뷔했습니다. 가수 남인수의 데뷔곡인 <눈물의 해협>은 박시춘 작곡가와 김상화 작사가가 만든 노래였는데, 남인수의 데뷔곡의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시에론레코드사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게 되는 시련까지 겪었습니다.

 

   2년 뒤인 1938년에 남인수는 오케레코드로 소속사를 옮긴 후 <애수의 소야곡>을 발표했습니다. 이때 남인수는 박시춘 작곡가와 다시 만나게 되었고, 이때부터 작곡가 박시춘과 가수 남인수는 희대의 명콤비가 되어서 한시대를 풍미하게 되었습니다. <애수의 소야곡>은 본래 <눈물의 해협>과 멜로디가 동일한 노래였는데, 박시춘 작곡가가 만든 기존의 노래에다가 작사가를 교체해서 이부풍 작사가가 만든 가사를 붙여서 발표한 노래입니다.

 

   1938년에 발표한 <애수의 소야곡>은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남인수를 상징하는 대표곡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남인수는 <애수의 소야곡>의 히트를 계기로 대한민국 가요계 최고의 슈퍼스타로 떠올랐고,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불멸의 가요 황제로 군림했습니다.

 

   <애수의 소야곡>은 당시 식민지의 설움을 겪고 있었던 조선의 백성들에게 커다란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데이치쿠 레코드사에서 일본어로도 취입이 되었습니다.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의 일본 버전은 <애수의 세레나데>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으며, 도도로키 유끼꼬라는 여가수와 듀엣으로 불렀습니다. <애수의 소야곡>은 일본에서도 대히트를 기록했습니다.

 

   당시 식민 치하의 조선에서는 오케레코드와 태평레코드라는 양대 기획사가 있었습니다. 오케레코드에서는 남인수와 이난영이 소속되어 있었고 남인수가 간판스타였습니다. 경쟁사인 태평레코드에서는 백년설이 간판스타였습니다. 남인수와 백년설은 1940년대 가요계를 대표하는 양대산맥이자 라이벌 관계였습니다. 남진,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보다도 약 30년가량 앞선 시기에 존재했던 남인수와 백년설의 라이벌 시대는 대한민국의 대중가요 역사에서 라이벌 구도의 원조라고 할 수 있었으며, 그 시대를 목격한 옛 어르신들에 의해서 구전으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남인수에 대한 기록물을 검색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보니까, 앞서서 조용필에 대한 콘텐츠를 제작할 때처럼 몇 년도에 무슨 노래를 발표했고,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를 상세하게 서술하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그저 히트곡의 목록을 단순 나열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데, 남인수는 25년을 조금 넘는 가수 활동 기간 동안 무려 1000곡을 불렀다고 합니다.

 

   남인수의 수많은 히트곡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히트곡의 목록을 나열하자면 <애수의 소야곡>, <추억의 소야곡>, <범벅 서울>, <돈도 싫소 사랑도 싫소>, <서귀포 칠십리>, <이별의 부산정거장>, <가거라 삼팔선>, <고향은 내 사랑>, <고향의 그림자>, <기다리겠어요>, <꼬집힌 풋사랑>, <낙화유수>, <남매>, <남아일생>, <눈 오는 네온가>, <달도 하나 해도 하나>, <무너진 사랑탑>, <무정열차>, <물방아 사랑>, <어린 결심>, <어머님 안심하소서>, <울리는 경부선>, <인생선>, <청년고향>, <청노새 탄식>, <청춘고백>, <감격시대>, <산유화>, <항구의 청춘시>, <울며 헤진 부산항> 등이 있습니다.

 

   남인수의 노래들은 당시 일제 식민통치로 고통받던 조선의 민중들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당대의 슈퍼스타이자 가요 황제로서 위대한 전설로 자리매김한 남인수 선생이지만, 그의 이름 뒤에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니는 오점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1943년에 당대의 대표적인 인기 가수였던 남인수, 백년설, 박향림이 함께 부른 군국가요 <혈서지원>을 불렀던 행적으로 인해서 2008년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그 이름이 기록된 것입니다.

 

   일단 <친일인명사전>에 그 이름이 등재가 된 이상, 언급 자체를 안 하고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친일파로 낙인을 찍어서도 안 되는 문제입니다.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들이 어쩔 수 없이 일제에 의해 동원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상을 고려하고 안타까운 역사의 희생자에 대해서는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 문제입니다.

 

   혹시 오해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몰라서 말씀드리는 건데, ‘친일행적에 대해서 무조건 온정주의적으로 동정론을 펼치자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등재됐다고 해서 무조건 낙인을 찍어서도 안 되는 문제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자발적, 적극적 친일인지, 아니면 공과를 나눠서 평가해야 하는 문제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강제동원된 피해자인지를 나누어서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일단 저의 견해를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촌 김성수같은 인물은 정말 공과를 나눠서 평가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인촌 김성수는 광복 이전에는 독립운동을 한 행적도 있고, 친일 행적도 있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한민당이라는 정당을 만들어서 이승만을 지지했던 행적도 있었지만, 이승만과 갈라선 뒤 해공 신익희 선생과 손을 잡고 민주당을 창당해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던 지도자로서의 행적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정말로 공과 과를 나눠서 평가해야 합니다.

 

   반면에 박정희의 친일은 그야말로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스스로 혈서를 써서 자원입대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친일파로, 광복 이후에는 공산주의자가 되었다가 다시 극우 반공주의자로 변신하는 등의 행적으로 인해 오점을 남겼고 이는 역사적으로 명백하게 단죄해야 할 문제입니다.

 

   반면에 남인수, 백년설, 박향림과 같은 가수들은 그 시절의 대표적인 스타였기 때문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압적으로 동원돼서 군국가요를 부른 것이기 때문에, 박정희의 친일과는 결이 다릅니다. 저 역시 친일파를 누구보다도 미워하는 사람이지만, 남인수 선생이나 백년설 선생 같은 분들은 아픈 역사의 희생자로서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1930년대에서 1950년대를 살았던 그 당시의 민중들에게도 남인수 선생과 백년설 선생은 존경의 대상이었던 분들이었습니다. 일제 식민 통치 당시의 조선 백성과 광복 이후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남인수 선생의 노래들은 크나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남인수 선생의 대표곡 중 하나인 <감격시대>라는 노래도 시간이 한참 지난 2000년대 이후에 일부 학자들에 의해서 친일 군국가요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는 했지만, 정작 1945년 광복 당시에는 많은 국민들이 <감격시대>를 부르며 광복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했었습니다.

 

   남인수는 1940년대 최고의 슈퍼스타였으며 195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여전히 건재하게 가요 황제로서의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1940년대에는 남인수와 백년설이 양대산맥 체제를 형성했고, 광복 이후인 1950년대에는 현인이라는 새로운 슈퍼스타가 등장하면서 남인수와 현인의 양대산맥 체제가 형성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라이벌 구도 자체에 포커스를 맞춰서 이야기할 때는 남인수와 백년설의 라이벌 구도가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경향이 있으며, 광복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서 가요계의 대표적인 슈퍼스타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남인수와 현인의 양대산맥 체제가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에는 당대의 대표적인 연예인들이 국방부 해군 정훈국 소속으로 국군 장병들에 대한 위문활동을 펼쳤습니다. 이때 위문활동을 했던 인물들 중에는 작곡가 박시춘, 가수 남인수, 현인, 강준희, 신카나리아, 심연옥, 송민도, 금사향, 영화배우 장동휘, 발레리나 최미선 등의 대중연예인들이 있었습니다.

 

   광복 직후와 6.25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는 현인이라는 새로운 슈퍼스타가 등장해서 <신라의 달밤>, <굳세어라 금순아>와 같은 불멸의 히트곡들을 탄생시키기도 했었는데요. 기존의 가요 황제였던 남인수도 여전히 건재하게 활약하며 수많은 히트곡들을 탄생시켰습니다. 특히 남인수의 히트곡 중에서도 역사적인 의미를 크게 남긴 노래 중에서는 1953년에 발표한 <이별의 부산정거장>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6.25 전쟁 당시 피난살이의 애환을 겪었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남인수 선생의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크나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남인수의 그 수많은 히트곡들 중에서도 광복 이전의 대표곡이 <애수의 소야곡>이었다면, 광복 이후의 대표곡은 <이별의 부산정거장>이었습니다. 1950년대 중반에는 <산유화>라는 불후의 명곡을 탄생시키기도 했습니다. 한편 <황성옛터>라는 노래도 원곡은 이애리수의 노래였지만, 남인수가 재취입한 버전의 <황성옛터>도 국민들에게 널리 사랑받았습니다.

 

   지금까지 나열한 남인수의 일대기 중 일부 내용은 위키백과를 참고하기도 했지만, 가장 많은 부분은 이동순 교수님의 칼럼인 <이동순의 그 시절 그노래>에서 대부분의 내용을 참고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서 <작사가 정두수 회고록: 가요따라 삼천리>에서 참고한 내용도 있는데, 1959년 당시 펼쳐졌던 남인수와 현인의 전설적인 노래 대결 무대에 대한 증언이 담겨 있습니다.

 

   1950년대 당시 불세출의 슈퍼스타였던 남인수와 현인의 인기가 절정을 구가하는 가운데, 당시 수많은 팬들 사이에서는 남인수와 현인이 한 무대에서 노래 대결을 펼친다면 누가 승산이 있을까?” 하는 이야기들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959년에 마침내 남인수와 현인의 역사적인 노래대결 무대가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남인수와 현인의 노래 대결을 오늘날의 <나는 가수다> 또는 <불후의 명곡>과 같은 정식 경연 프로그램과 같은 성격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보다는 양대 슈퍼스타가 한 무대에서 노래 실력을 뽐내고 팬들은 이를 즐기는 일종의 축제와도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전국의 대표적인 도시인 서울, 부산, 대구, 대전, 광주, 인천 등을 돌며 순회공연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비록 정식 경연 프로그램은 아니었고, 승패가 명확하게 판가름이 나는 것도 아니기는 했지만, 당대의 팬들에게는 엄청난 이슈였다고 합니다. 이 순회공연 무대는 챔피언 남인수, 도전자 현인의 구도로 한 곡씩 번갈아서 자신의 히트곡을 선보이며 노래 대결을 펼치는 컨셉으로 진행되었는데, 챔피언 남인수의 응원단장으로는 막둥이구봉서가 나섰고, 도전자 현인의 응원단장으로는 후라이보이곽규석이 나섰습니다.

 

   무대 왼쪽은 도전자인 현인과 그 팬들이 차지했고 무대 오른쪽은 챔피언인 남인수와 그 팬들이 차지했습니다. 도전자 현인이 먼저 나와서 노래를 부르고 그다음에 챔피언 남인수가 나와서 노래를 부르며 응수하고, 계속해서 주거니받거니 하는 컨셉의 공연 무대가 펼쳐졌습니다. 정식으로 승자와 패자가 판가름난 것은 아니지만,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피날레 무대는 챔피언 남인수가 장식했다고 합니다.

 

   1959년 당시의 남인수와 현인의 노래대결 무대는 TV로 녹화된 영상이나 라디오로 녹음된 음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 당시의 공연을 목격한 옛 어르신들의 증언에 의해서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전에 의해서 회자되고 있는 전설적인 노래대결 무대가 펼쳐졌던 당시의 상황을 정두수 작사가님이 문화일보에 기고한 회고록을 통해서 생생하게 묘사하며 증언하고 있습니다.

 

   원로 가수들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올 때 남인수와 이난영의 로맨스 이야기는 항상 빠지지 않고 단골로 등장하는 레파토리이기는 한데, 제가 이에 대한 내용을 상세하게 다루기에는 다소 부담이 되는 부분이 있어서 여기에서는 자세한 언급은 피하려고 합니다. 그래도 간략하게 언급할 만한 부분이 하나 있는데, 남인수 선생이 별세하셨던 1962년 당시 고인의 곁을 지켰던 분이 이난영 여사였다고 합니다.

 

   남인수는 지병인 폐결핵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는 가운데에서도 노래에 대한 열정을 멈추지 않았는데요. 1960년에는 4.19 혁명 당시 이승만 독재정권의 총탄에 스러져간 어린 학생(김주열 열사)을 추모하는 노래인 <사월의 깃발>을 발표했습니다. 1961년에는 병실 침대에서 온 힘을 다해서 마지막 노래를 불렀는데요. 이렇게 해서 발표한 노래인 <무너진 사랑탑>은 남인수의 마지막 히트곡이 되었습니다.

 

   남인수 선생은 한국연예인협회 부이사장, 대한가수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19627월에 지병인 폐결핵으로 별세했습니다. 남인수 선생의 장례식은 연예인협회장으로 거행되었습니다. 유튜브에서는 1962년 당시의 남인수 선생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는 뉴스가 담긴 동영상을 검색해서 볼 수 있는데, 수많은 추모 인파가 모여들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수많은 추모 인파가 모여드는 장면은 유명 정치인 또는 종교 지도자의 장례식에서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1949년에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했던 당시와 1956년에 해공 신익희 선생의 국민장이 거행되었을 당시, 그리고 2009년에 김수환 추기경이 서거했을 당시와 노무현 대통령의 국민장, 김대중 대통령의 국장이 거행되었을 당시에 수많은 추모 인파가 모여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1962년 당시에 남인수 선생의 연예인협회장이 거행되던 당시에도 수많은 추모 인파가 모여들었습니다. 그 당시 남인수 선생이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비록 정치인이나 종교 지도자가 아닌 대중 연예인이지만, 당대의 가요 황제 남인수 선생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정치인이나 종교 지도자 못지않게 사랑받고 존경받는 존재였습니다.

 

   남인수가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조용필과 거의 동급이거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역사 속의 인물에 비유할 때 조용필이 세종대왕이라면 남인수는 광개토태왕에 비유할 수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비록 과거의 역사에 대한 기록물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것이 다소 미흡하다 보니까 후대에 제대로 전해지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역사적 사실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광개토태왕이라는 역사 속 인물에 대한 평가도 그러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국사 교육을 할 때 1980년대까지는 고구려가 별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가 1990년대 이후부터 고구려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고대사의 대표적인 왕의 명칭도 1980년대에는 광개토왕이었다가 1990년대부터는 광개토대왕이 되었고 2000년대 후반 이후부터 201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광개토태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역사 속 인물의 존재와 역사적 사실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역사가들이 역사를 기록하고 전승하는 책임을 소홀이 한 탓으로 인해서 과거의 역사가 제대로 전승되지 못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서 그 역사적 의미가 재평가되고, 고대사에 대한 과거 기록들이 하나둘씩 복원되어 가고 있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가요 황제남인수에 대한 역사 기록이 후대에 전해지는 과정도 이와 흡사한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1930년대에서 1950년대 당시를 살았던 광복 이전의 조선과 광복 이후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남인수는 불멸의 스타이자 살아있는 전설이었습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당시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조용필이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떠올려본다면, 1930년대부터 1950년대 당시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남인수가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아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부터 1950년대를 살았던 그 시대의 어르신들 중에서 오늘날 생존해 계신 분들이 얼마 안 계십니다. TV도 라디오도 인터넷도 없었던 그 시절에는 가요계의 역사가 체계적으로 기록되고 전승되지 못했고, 그렇게 해서 후대의 사람들에게 잊혀진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트로트가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고, 고령화 사회를 맞이해서 수많은 어르신들에게 전통가요가 사랑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오늘날 트로트 내지는 전통가요를 사랑하는 그 어르신들도 남인수의 시대를 경험한 세대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부모님 세대 또는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를 통해서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 조용필의 전성기 시절에 대한 역사를 구전으로 전해듣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60대에서 80대에 이르는 어르신들도 역시 어린 시절이나 젊은 시절에 자신들의 부모님 세대 또는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를 통해서 남인수, 백년설, 현인, 이난영, 고복수, 김정구 등의 원로 가수들의 전성기 시절에 대한 역사를 구전으로 전해들었던 세대입니다.

 

   그래도 KBS<가요무대>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과거 원로 가수들의 수많은 불후의 명곡들에 대한 역사가 꾸준히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인 김동건 아나운서는 우리의 전통가요의 역사를 증언해주는 증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원로 가수들과 후배 트로트 가수들이 전통가요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202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한민국에서 다시한번 트로트 열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도 2000년대나 2010년대에 트로트가 일시적으로 유행했던 시기는 있었지만, 이번에는 뭔가 다른 분위기입니다. 그냥 단순한 일시적 유행에 그치지 않고 과거의 전통가요에 대한 역사가 재조명되기 시작하고 있으며, 젊은 트로트 신동들이 과거 원로 가수들과 선배 가수들의 전통가요를 오디션 프로그램 무대에서 훌륭하게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특히 송가인, 임영웅 등의 슈퍼스타가 탄생하면서 트로트와 전통가요에 대한 붐이 조성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과거 전통가요 전설들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흐름과 함께 전통가요의 역사를 집대성한 <트로트 열풍 남인수에서 임영웅까지- >라는 책이 출간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마치 광개토왕이 광개토태왕으로 재조명된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닌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신예 트로트 가수 조명섭의 등장도 아주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조명섭은 보통 현인의 환생으로 불리고 있으며 현인의 노래들을 가장 많이 불렀고 대표곡도 현인의 <신라의 달밤>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조명섭이 부른 노래 중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또 하나의 노래는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조명섭의 외모나 패션에서 풍겨나오는 이미지나 분위기도 역시 남인수의 리즈 시절을 연상시키는 옛날 멋쟁이’, ‘옛날 신사내지는 모던보이를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조명섭은 현인의 환생이라는 별명과 함께 남인수의 환생이라는 별명도 함께 얻었습니다. 그리고 신예 트로트 가수 조명섭의 등장을 계기로 해서 1940년대와 1950년대를 풍미했던 전설의 가수인 남인수와 현인의 존재감이 다시 소환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옛 전통가요의 전설들과 그 역사가 재조명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고 고무적인 현상이지만, 그래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기는 합니다. 마치 트로트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이 부분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취급되는 듯한 분위기가 좀 아쉽게 느껴집니다.

 

   제가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전통가요를 대표하는 인물인 전설의 가요 황제 남인수에 대해서 다루는 것 역시 제 나름대로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냥 단순히 전통가요의 역사를 복원하고 디테일하게 다루는 데에 있어서라면 저보다도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계신 분들이 이미 많이 있습니다. 조명섭이라는 가수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인터넷에 역사 자료를 정리해서 올려주신 분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인 것이죠.

 

   그렇기는 하지만, 제가 특별히 신경을 쓰는 부분은 오늘날의 케이팝 아이돌을 좋아하는 젊은 세대들도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면서 20세기의 전통가요와 21세기의 케이팝의 역사를 아우르는 그러한 역사 기록들이 제대로 전승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윤심덕에서 방탄소년단까지이어지는 계보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은 이 콘텐츠를 작성하고 있는 저 역시 트로트 음악보다는 아이돌 음악을 더 좋아하는 사람 중의 한 명입니다. 저는 옛날 아이돌과 요즘 아이돌을 다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굳이 따지면 옛날 아이돌을 좀 더 좋아하는 편입니다. 실제 제 나이 또래로만 따진다면 서태지, 현진영의 세대와 HOT, 젝스키스의 세대의 딱 중간지대, 경계선에 위치한 세대이기도 하죠. 바로 저와 같은 사람들에게 윤심덕에서 방탄소년단까지의 계보를 통해서 대한민국의 전통가요와 케이팝의 역사의 연결고리가 제대로 전승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사실 저와 비슷한 또래의 80년대생들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박남정, 김완선, 소방차, 도시의 아이들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으며,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과 중학생 시절에 이르러서는 서태지와 현진영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고 고등학생 시절에는 HOT와 젝스키스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세대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그러한 옛날 아이돌 팬 중의 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 우리 또래들끼리만 주고받던 이야기들, 그 좁은 시야에만 틀어박혀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기 세대, 자기 시대의 세계관이 역사의 전부인 것처럼 인식되는 그런 분위기가 너무 아쉬웠습니다.

 

   특히 저보다 좀 더 윗세대인 70년대생이나 저와 비슷한 또래인 80년대생들이 중년에 접어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인터넷 커뮤니티를 장악하면서, 90년대 이전 전통가요는 촌스럽다면서 무시하고, 요즘 10, 20대의 아이돌 팬덤을 윽박지르는 젊은 꼰대의 모습으로 변질되어 가는 문화에 대해서도 강한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저의 또래 세대보다는 윗세대와 아랫세대의 가요계 역사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시작됐던 일이었지만, <불후의 명곡>과 같은 프로그램들을 통해서 20세기 전통가요의 팬들과 21세기 케이팝의 팬들이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문화가 확산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에게도 강한 울림을 주었고,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에 대해서 더 깊이 파고들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튜브라는 매체의 활성화로 인해서 과거 TV를 통해 방송됐던 귀중한 영상 자료들이 업로드되면서, 소중한 옛 역사 자료들이 전파되고, 그 팬들이 다시 댓글을 통해서 모여들면서 옛 역사와 추억이 보존되고 재조명되는 현상 자체는 무척 바람직하고 고무적인 현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있었습니다. 다들 딱 자기 또래들끼리 우물 안 개구리처럼 주고받는 이야기들, 딱 그 시야에 갇혀서 그 세계관이 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치부되고, 각 연령대별로 완전히 따로 노는 그 현상에 다소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연령대에 따라서 옛날 트로트 중심의 전통가요에 대해서는 연배가 좀 있는 어르신들만 관심을 가지고, 요즘의 10대와 20대는 오늘날 잘나가는 현역 아이돌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 중간에서 낀세대에 해당하는 70년대생, 80년대생, 90년대생들은 점차 젊은 꼰대로 변질되어 가는 모습에 아쉬움이 느껴졌습니다.

 

   특히 저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 중 인터넷에서 목소리를 크게 내는 사람들일수록 옛날 아이돌만 찬양하고 요즘 아이돌 팬덤을 윽박지르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ROCK 뮤지션, 힙합 뮤지션만 절대적으로 추종하는 부류의 매니아층으로 나뉘어서 다들 자기 또래의 가수들만 최고의 전설이라고 우겨대는 이런 현상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래도 저처럼 전통가요에서 케이팝을 아우르는 대한민국의 가요계 전체의 역사에 대해서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이 많지는 않더라도, 아주 조금이나마 존재한다면 그 호기심을 해소하면서 역사 자료에 대한 증언과 기록물을 보존하고 전승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특히 1950년대 이전 전통가요에 대한 역사가 그저 트로트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만 이야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저처럼 아이돌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역사에 대해서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고 그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후대에 전승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인수라는 인물은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만약 1930년대부터 1950년대를 살았던 그 시절의 대한민국 국민들의 역사에 대한 증언과 기록물들이 제대로 전승되었다면, 남인수는 오늘날 이미자, 나훈아, 조용필 이상으로 전설에 대한 제대로 된 예우를 받았어야 하는 인물입니다.

 

   비록 역사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이 미비하던 시절이었고, TV와 라디오, 인터넷의 혜택도 전혀 받지 못한 시대였고, 평론가들에게도 성의없이 취급됐던 시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의 역사에 대한 증언들이 구전을 통해서 끊임없이 전승되고, 또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역사 자료를 기록하고 보존하고 인터넷에 올려서 후대에 전승해주신 분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조명섭과 같은 가수도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고, 저처럼 아이돌을 좋아하던 평범한 팬들도 과거의 역사 자료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2, 남인수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무리하려 합니다. 다음 회차에서는 레전드 3위에 해당하는 인물인 현인에 대해서 다룰 차례입니다. 2020년대의 트로트 열풍이 일시적인 유행에 그치지 않고, 옛 전통가요의 전설들에 대한 역사가 후대에 제대로 전승되는 소중한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저도 아주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습니다.

 

 

{출처 : 위키백과, 나무위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그 외 신문 기사, 텔레비전 방송, 인터넷 뉴스 기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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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2위 – 남인수

[[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2위 – 남인수 ]]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시리즈, 그 두 번째 시간. 한국 대중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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