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5위 – 나훈아 ]]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시리즈, 그 다섯 번째 시간.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5위, 나훈아. 1970년대와 80년대 가요계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당대의 슈퍼스타이자 가황, 나훈아에 대한 이야기가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TOP 50> 시리즈의 남진 편과 나훈아 편을 본격적으로 연재하기에 앞서서 콘텐츠의 기본적인 컨셉과 기획의도, 구성 등에 관한 부분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문서 작업의 순서는 남진 편을 먼저 작성하고 나훈아 편을 나중에 작성한 뒤, 유튜브 업로드 순서는 5위 나훈아 편을 먼저 업로드하고 6위 남진 편을 나중에 업로드할 계획입니다.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라이벌 구도가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에 걸쳐서 펼쳐졌던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인 만큼, 두 슈퍼스타는 항상 서로 함께 언급될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렇기는 한데, 언론 매체에서 이들의 라이벌 관계에 대한 역사를 다루는 방식과 인터넷 댓글창에서 양측의 팬들이 반응하는 방식에는 좀 온도차가 많이 나는 편입니다.
일반적으로 공중파 TV나 케이블 TV 같은 매스컴에서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에 대해 다루는 방식을 보면 너무 도가 지나칠 정도로 아름답게만 포장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남진과 나훈아, 두 슈퍼스타만이 존재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그리고 유튜브에서 남진과 나훈아에 대해 소개하는 영상 자료들도 대체로 비슷한 분위기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댓글들은 영상 자료의 분위기와는 너무도 딴판입니다. 특히 양측의 극성팬들이 댓글창에 몰려들기 시작하면 험악한 말들이 오가면서,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쨉도 안 되는데, 라이벌로 엮지 좀 말라!”고 말하는 댓글들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진흙탕 싸움으로 흘러가면서 눈쌀이 찌푸려지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들을 보면서, 저는 이번 시리즈를 작성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원칙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저의 기획의도와 컨셉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저는 기존의 영상 자료들에서처럼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에 대한 역사를 소개하면서 굳이 아름답게만 포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댓글 반응에 일일이 휘둘리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그냥 예전에 어떤 일들이 있었고 오늘날 팬들 사이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만 최대한 사실적으로 기록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남진 편과 나훈아 편의 초반부에서는 상당 부분 멘트가 겹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의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에 대한 역사를 기록하려면 공통적으로 겹치는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가수 개인 대 개인의 라이벌 관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양대 기획사였던 지구레코드와 오아시스레코드의 헤게모니 다툼이 근본적인 배경에 깔려 있기도 하고,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의 가요계의 전반적인 흐름에 관한 설명도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1960년대와 1970년대까지의 가요계 역사를 서술하는 부분, 그리고 지구레코드와 오아시스레코드의 파워게임에 관한 부분을 설명하는 것은 남진 편과 나훈아 편에서 공통적으로 다룰 계획입니다. 실제로 이 콘텐츠를 시청하는 분들은 남진 편만 검색해서 보거나 나훈아 편만 검색해서 보는 분들이 꽤 많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남진 편에서 언급했다고 해서 나훈아 편에서 생략하고 넘어간다든가, 나훈아 편에서 언급했다고 해서 남진 편에서 생략하고 넘어간다든가 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반면에 1980년대 이후부터 2000년대를 넘어서 2020년대에 접어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굳이 두 사람의 라이벌 구도를 더 이상 언급하지는 않을 계획입니다. 이미 1980년대 이후부터 남진과 나훈아, 두 분이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계속해서 라이벌로 엮으면서 남진 편에서 나훈아에 대한 언급을 한다든가, 나훈아 편에서 남진에 대한 언급을 한다든가 그럴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TOP 50> 시리즈의 기본적인 컨셉은 KBS의 <불후의 명곡>이나 SBS의 <아카이브K>처럼 역사를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데에 중점적인 목표를 둘 계획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제가 정식으로 연예계나 음악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까 공식적인 언론 매체의 프로그램과 완전히 똑같이 만들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접하게 되는 현실 공간에서는 매스컴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어둠의 세계’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그러한 ‘어둠의 세계’의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되는 영역입니다. 매스컴에서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는 가수나 연예인들에 대한 역사를 서술할 때 어떻게든 아름답게만 포장하려 하는 경향이 있지만, 인터넷 공간의 댓글창에서는 팬들 사이의 진흙탕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인터넷 댓글창에서의 ‘진흙탕 싸움’의 실체를 굳이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날 인터넷 댓글창에서 남진, 나훈아, 조용필 세 분의 팬들 사이에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최대한 사실적으로 기록할 계획입니다.
블로그 문서를 작성하고 유튜브 영상을 업로드하는 데 있어서 참고한 자료들의 출처에 대해서 먼저 간략하게 언급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가장 기본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자료들에는 위키백과, 나무위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우리가요 아카이브K 홈페이지 같은 곳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에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여러 신문사의 기사를 검색하면서 기자나 칼럼니스트들이 작성한 기사나 칼럼 등을 더 폭넓게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음악평론가 최규성 씨가 2020년 10월 17일에 월간중앙에 기고한 칼럼인 <문화열풍/특별기고 - 테스형으로 돌아온 나훈아 파워의 비밀>, 음악평론가 김형찬 씨가 2016년 7월 4일부터 7월 18일까지 국제신문에 기고한 3부작 칼럼 시리즈인 <김형찬의 대중문화 이야기 - 남진, 나훈아. 숙명의 라이벌>, 매일신문의 2018년 3월 2일 기사인 <문화인 & 스토리 - 영원한 젊은 오빠 남진>, 서울신문의 2015년 3월 25일 기사인 <썬데이서울로 보는 그때 그 시절>, 1982년 4월 20일부터 5월 1일까지 동아일보에서 11부작으로 연재한 <명대결 - 나훈아와 남진> 시리즈를 통해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오늘날의 10대부터 40대까지의 연령대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남진과 나훈아가 활동하던 시대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눈높이에서 과거 역사를 대입해서 해석하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때 요즘 10대부터 40대까지의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인용되는 라이벌 구도에는 HOT vs 젝스키스, 동방신기 vs 빅뱅, 원더걸스 vs 소녀시대, 엑소 vs 방탄소년단, 트와이스 vs 블랙핑크의 라이벌 구도에 대입해서 설명해보려고 하는 시도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인용되는 HOT와 젝스키스의 라이벌 구도를 예로 들어서 설명하는 것이 오늘날의 10대부터 40대까지의 사람들에게 가장 쉽게 와닿을 수 있는 비유법일 것입니다. 저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에게 가장 유명한 HOT와 젝스키스의 라이벌 구도에서 단순히 ‘문희준 vs 은지원’, ‘강타 vs 강성훈’, ‘장우혁 vs 이재진’ 같은 개인 간의 라이벌 구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본질적인 부분이 있죠. 바로 SM 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 사장과 DSP 엔터테인먼트의 이호연 사장의 헤게모니 다툼이 그 근본에 깔려 있는 배경입니다.
사실 SM의 이수만 사장은 DSP의 이호연 사장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많이 신경을 쓰는 편은 아니었고, DSP의 이호연 사장이 SM의 이수만 사장에게 일방적으로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끊임없이 도전장을 던지는 구도였습니다. DSP의 이호연 사장이 SM의 간판스타 HOT를 타깃으로 삼아서 탄생시킨 그룹이 젝스키스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죠. 그래서 젝스키스는 처음 데뷔를 준비하던 당시부터 ‘타도 HOT’에 대한 강박관념을 주입받아 왔습니다.
그러다가 젝스키스가 데뷔하고 나서 기세가 심상치 않다 보니까 SM 측에서도 젝스키스에 대해서 열심히 모니터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HOT도 젝스키스를 신경쓸 수밖에 없도록 압박을 받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DSP가 SM을 향해서 일방적으로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젝스키스에게 HOT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주입시켰지만, 나중에 가서는 SM에서도 DSP를 의식하기 시작하고, HOT에게 젝스키스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주입시키게 되죠.
여기에서 SM 엔터테인먼트 이수만 사장의 자리에 지구레코드 임정수 사장, DSP 엔터테인먼트 이호연 사장의 자리에 오아시스레코드 손진석 사장, HOT의 자리에 남진, 젝스키스의 자리에 나훈아를 대입하면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한번 상상해 보세요. 만약 젝스키스가 어느 날 갑자기 SM으로 소속사를 옮겨서 유영진 작곡가한테 곡을 받아서 신곡을 발표했다면 어떠한 파장이 일어났을까요? 상상이 가시나요? 이게 바로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에 일어났던 일들입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걸쳐서 전개됐던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의 그 본질적인 배경은 지구레코드 임정수 사장과 오아시스레코드 손진석 사장의 대립구도입니다. 당대의 양대 기획사의 헤게모니 다툼과 신경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상황에서, 두 기획사 사장의 대리전을 수행하기 위해 지구레코드 임정수 사장의 아바타로 선택된 인물이 남진, 오아시스레코드 손진석 사장의 아바타로 선택된 인물이 나훈아였던 것입니다.
지구레코드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의 대중가요계를 지배했던 최대의 기획사였습니다. 당시의 지구레코드의 파워는 오늘날의 SM이나 YG보다도 훨씬 더 대단한 위세를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지구레코드는 1960년대에 미도파레코드라는 이름으로 출범했다가 나중에 회사명을 바꾸게 되는데, 이미자의 등장을 계기로 국내 최대의 기획사로 자리매김한 후 1980년대에는 조용필을 소속 가수로 보유하며 그 영향력을 떨쳤습니다.
지구레코드의 전속 작곡가가 그 유명한 박춘석 선생이었고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를 비롯해서 당대의 유명 가수들이 거의 대부분 지구레코드를 한번쯤은 거쳐가면서 박춘석 작곡가에게 곡을 받아서 수많은 히트곡들을 배출했습니다. 이렇게 박춘석 선생의 곡을 받아서 히트한 가수들을 일컬어서 ‘박춘석 사단’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1960년대의 이미자와 1980년대의 조용필은 꾸준하게 지구레코드 전속 가수로 활동했고, 패티김은 신세기레코드, 오아시스레코드, 지구레코드를 모두 거쳐간 경력이 있으며 남진과 나훈아는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데뷔해서 지구레코드로 이적했습니다.
지구레코드와 경쟁 관계였던 오아시스레코드는 지구레코드보다 더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오아시스레코드에서 유망한 신인 가수를 스타로 키워내면 지구레코드에서 냉큼 낚아채 가곤 했습니다. 오아시스레코드는 지구레코드보다 자금력에서 한참 열세에 있었기 때문에 눈뜨고 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오아시스레코드의 손진석 사장은 지구레코드의 임정수 사장에게 뿌리깊은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있었고, 지구레코드의 임정수 사장은 오아시스레코드를 그렇게까지 적수로 의식하지는 않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남진이 가수로 처음 데뷔했을 때는 오아시스레코드 소속 가수로 데뷔했지만, 얼마 후에 지구레코드로 이적해서 슈퍼스타로 발돋움했습니다. 남진이 지구레코드로 이적한 이후에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데뷔한 신인 가수가 나훈아였습니다. 오아시스레코드의 손진석 사장이 지구레코드의 남진을 타깃으로 삼아서 키워낸 가수가 바로 나훈아였습니다. 따라서 나훈아는 처음 가수로 데뷔하던 그 순간부터 오아시스레코드의 손진석 사장을 통해서 남진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끊임없이 주입받아야 했습니다.
나훈아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보니까 비로소 지구레코드의 임정수 사장도 오아시스레코드의 나훈아를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 지구레코드에서는 월남전 파병을 나가 있던 남진을 잠시 귀국시켜서 <사랑이 스쳐간 상처>라는 신곡을 취입하게 했습니다. 남진의 <사랑이 스쳐간 상처>는 나훈아의 <두 줄기 눈물>을 제치고 가요차트 1위에 올랐습니다. 이때가 바로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대결이 최초로 개시된 시점이었습니다.
1971년에 남진이 월남(베트남)에서 귀국한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전이 격화되면서 1971년부터 1973년까지 3년간의 전쟁과도 같은 대결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남진도 지구레코드의 임정수 사장을 통해서 나훈아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끊임없이 주입받아야 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 남진의 출세작이었던 <가슴아프게>는 박춘석 작곡가에게 받은 곡이었습니다. 나훈아의 출세작이었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은 남국인 작곡가가 작사에 참여했던 곡이었습니다. 당시 남국인 작곡가는 지구레코드에 소속된 상태에서 오아시스레코드 소속 가수인 나훈아의 곡에 가사를 써주는 상황이 발생했는데, 이 때문에 나훈아의 음반이 발표될 당시에 작곡가와 작사가의 이름은 본명이 아닌 예명이 표기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지구레코드와 오아시스레코드의 사활을 건 전쟁에서 양대 기획사 사장의 아바타로 내세워진 인물이 남진과 나훈아였습니다. 그런데 이 싸움이 흥행이 되다 보니까 매스컴에서 대놓고 싸움을 부추기기 시작했습니다. 남진과 나훈아는 처음에는 남의 싸움에 등떠밀려서 얼떨결에 선봉장이 되었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역할에 몰입하게 되면서 진심으로 라이벌 의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1972년에 나훈아가 먼저 회심의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남진의 소속사인 지구레코드로 이적하면서 적진으로 뛰어든 것입니다. 당시 지구레코드에서 남진에게 해주던 대우에 비해서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나훈아에게 해주는 대우는 다소 미흡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나훈아와 오아시스레코드 손진석 사장이 갈등을 빚던 와중에 지구레코드에서 나훈아를 잽싸게 스카웃해 간 것이었습니다. 소속사의 규모와 자금력에서도 지구레코드가 오아시스레코드를 압도했고, 지구레코드에는 당대 최고의 작곡가인 박춘석 선생이 있었습니다. 나훈아는 남진과의 라이벌 대결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지구레코드로 이적해서 박춘석 작곡가에게 곡을 받아서 <물레방아 도는데>를 발표했습니다.
이번에는 남진이 강력하게 반발하기 시작했습니다. 1972년 3월 26일자 썬데이서울 기사에 따르면 당시 남진은 지구레코드와의 재계약 포기를 선언했고, 이 때문에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남진의 영입에 나설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남진의 소속사 이적이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남진은 소속사와 갈등을 빚는 과정에서 새로운 작곡가를 파트너로 물색 중이었고, 남국인 작곡가를 만나서 그의 대표곡인 <님과 함께>를 취입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지구레코드 임정수 사장의 중재가 있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 남진의 <가슴아프게>는 박춘석 작곡가에게 받은 곡이었고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은 남국인 작곡가가 작사에 참여했던 곡이었습니다. 1972년에는 이러한 파트너쉽 관계가 완전히 거꾸로 뒤바뀌면서, 박춘석 작곡가가 나훈아에게 <물레방아 도는데>라는 곡을 주었고, 남국인 작곡가가 남진에게 <님과 함께>라는 곡을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는 더 이상 지구레코드와 오아시스레코드의 대리전이 아닌, 가수 본인이 진심으로 대결에 임하게 되는 전면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가요계의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라이벌 구도로 꼽히는 관계가 1940년대의 남인수 vs 백년설의 격돌, 그리고 1970년대의 남진 vs 나훈아의 격돌이었습니다. 30년 간격을 두고 펼쳐진 두 라이벌 구도에서는 마치 평행이론처럼 닮은꼴로 역사가 반복되었습니다. 단순히 가수 개인의 라이벌 구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양대 기획사의 헤게모니 다툼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그 대리전을 수행하기 위한 선봉장으로 소속 가수를 내세웠던 것입니다.
광복 이전에는 <오케레코드>라는 당대 최고의 기획사가 있었고 광복 이후에는 <지구레코드>라는 당대 최고의 기획사가 있었습니다. <오케레코드>에게는 <태평레코드>라는 라이벌 기획사가 존재했고, <지구레코드>에게는 <오아시스레코드>라는 라이벌 기획사가 존재했습니다. <오케레코드>의 전속 작곡가였던 박시춘 선생은 광복 이전의 최고의 작곡가였던 동시에 대한민국의 대중가요 역사상 최고의 작곡가였습니다. <지구레코드>의 전속 작곡가였던 박춘석 선생은 광복 이후의 대한민국의 최고의 작곡가였습니다.
1940년대에는 <오케레코드 - 작곡가 박시춘 - 가수 남인수>의 라인업과 <태평레코드 - 작곡가 이재호 - 가수 백년설>의 라인업이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백년설이 <오케레코드>로 이적하면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고, 간판스타 백년설을 빼앗긴 <태평레코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로부터 30년이 지난 1970년대에는 나훈아가 <지구레코드>로 이적하면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고, 간판스타 나훈아를 빼앗긴 <오아시스레코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마치 평행이론처럼 흡사한 구도로 역사가 반복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10대부터 40대까지의 사람들에게는 <SM 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의 이름을 들으면 ‘거대 기획사의 횡포’를 떠올리게 되는 악명높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악명높은 SM조차도 DSP에서 젝스키스를 빼간다거나, YG에서 빅뱅을 빼간다거나, JYP에서 원더걸스를 빼간다거나, 빅히트에서 방탄소년단을 빼간다거나 하는 만행을 저지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광복 이전 최대의 기획사였던 오케레코드에서는 경쟁사인 태평레코드의 간판스타 백년설을 빼가는 만행을 저질렀고, 광복 이후 최대의 기획사였던 지구레코드에서는 경쟁사인 오아시스레코드의 간판스타 나훈아를 빼가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 외에도 과거의 사례들을 더 구체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오케레코드와 지구레코드는 경쟁사의 간판스타들을 닥치는대로 빼가는 만행을 저질러왔습니다. 대한민국의 대중가요 역사를 풍미한 희대의 라이벌 구도로 회자되는 <남인수 vs 백년설>, <남진 vs 나훈아>의 두 라이벌 관계의 이면에는 이와 같은 거대 기획사의 횡포와 알력다툼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1960년대에서 70년대에 걸친 전체적인 가요계의 동향에 대해서도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가요계 최고의 스타는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였습니다. 일반적으로 10년 단위로 시대 구분을 할 때 이미자와 패티김을 1960년대의 인물로, 남진과 나훈아를 1970년대의 인물로 분류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서 이미자가 가요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이미자와 함께 패티김이 라이벌이자 양대산맥으로 꼽히기는 했지만, 패티김은 주로 해외활동에 주력하다가 가끔씩 귀국하면 매스컴에서 대대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고, 대형 공연 무대를 통해서 이미자와 경쟁을 벌이는 구도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미자와 패티김은 주로 정면대결을 펼치기보다는 서로 활동 영역을 달리하고 있었습니다. 국내 무대에서의 가요 차트나 연말 시상식은 이미자의 독무대였고, 패티김은 국내 무대에서의 연말 가요 시상식에서는 자주 만나기 힘든 인물이었습니다.
이미자가 국내 무대를 휩쓸고 있던 시절에 남자 가수 중에서 가요계의 왕좌에 도전했던 대표적인 인물들은 최희준, 배호가 있었습니다. 최희준은 <하숙생>의 히트에 힘입어서 1965년 TBC 방송가요대상과 1966년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가요대상 수상자로 등극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는 배호가 <안개 낀 장충단공원>, <돌아가는 삼각지> 등의 히트곡을 배출하며 최고의 슈퍼스타로 떠올랐습니다. 배호는 당대의 어르신들에게 이미자 못지않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에 걸쳐서 새로운 세대의 슈퍼스타로 남진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최고의 남자가수 자리는 배호에서 남진으로 세대교체가 진행중이었고, 가요계의 제왕 자리는 이미자의 시대에서 남진의 시대로 세대교체가 진행중이었습니다. 남진은 1967년에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처음으로 10대가수에 선정됐습니다.
남진은 1968년에 해병대에 입대하면서 1970년까지 약 3년간의 공백기를 가졌습니다. 군생활 기간 동안 연예활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1969년부터는 월남전 파병을 나가면서 국내 무대에서 자리를 비우게 됐습니다. 남진은 베트남으로 떠나고 없는 상태에서도 여전히 건재하게 인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1969년 TBC 방송가요대상에서는 국내 무대에 부재중인 상태였던 남진이 남자가수 대상을 수상하는 저력을 과시했습니다.
나훈아는 1969년에 <사랑은 눈물의 씨앗>의 히트에 힘입어서 스타덤에 오르기 시작했고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는 처음으로 10대가수에 선정됐습니다. 나훈아는 배호와 닮은 창법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남진의 라이벌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나훈아는 배호와는 닮은꼴 캐릭터로 비교대상이 되었고, 남진과는 정반대의 대조적인 캐릭터로 비교대상이 되었습니다.
1971년에 남진이 월남전 파병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남진과 나훈아의 본격적인 대결구도인 ‘3년 전쟁’이 막을 올렸습니다. 당시 MBC 방송국에서는 남진의 귀국을 환영하는 특별무대를 마련해주었고, 남진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GI 블루스>를 불렀습니다. MBC에서 예전에 자료화면으로 종종 접할 수 있었던 흑백 영상에서는 남진이 엘비스 프레슬리의 무대를 멋지게 재연해내고, 여성 댄서들이 “하나둘셋넷! 하나둘셋넷!”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 희대의 명장면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1971년 연말 시상식에서 남진은 TBC 방송가요 대상의 <남자가수 대상>과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최고 인기가수>를 휩쓸며 나훈아와의 라이벌 대결에서 완승을 거뒀습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슈퍼스타 남진이 가요대상을 수상한 것이 어찌보면 당연하게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나훈아의 팬들은 당시의 일에 대해서 뼈에 사무치는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나훈아 팬들의 주장도 분명 일리가 있는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1971년의 가요대상은 1971년 한 해 동안 최고의 활동 실적을 올린 가수에게 주는 상입니다. 1971년에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가장 히트곡을 많이 배출한 가수는 나훈아였습니다. 그런데 남진이 귀국한 직후부터 방송국에서 남진에게 특별대우를 해주면서 대상까지 수여한 것은 너무 편파적이라는 주장이 오늘날까지도 종종 거론되곤 합니다.
물론 당대의 가요계에서 가수의 활동 여부와 관계없이 순전한 인기에 따른 서열은 이미자가 1순위, 남진이 2순위였습니다. 당시 남진이 월남전 파병을 마치고 금의환향하던 사회적인 분위기를 감안하면 남진이 당대 최고의 스타였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1971년 가요대상의 시상기준에 가장 부합하는 가수가 나훈아였음에도 불구하고 남진에게 대상을 빼앗겼다는 점이 나훈아 팬들이 두고두고 억울하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남진 팬들의 입장에서도 나름의 억울함이 있기는 합니다. 남진이 해외여행을 떠난 것도 아니고, 해외에서 연예활동을 한 것도 아니고 국가의 부름을 받고 월남전에 파병됐다가 금의환향을 했던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에 따르면 충분히 특별대우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이 남진 팬들의 기본적인 정서입니다. 월남전 참전용사로서 그에 합당한 예우를 받을 자격이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특혜라느니, 편파적이라느니 하는 소리를 듣는다는 점에서 남진 팬들도 역시 억울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1972년에는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대결이 정점을 찍었던 해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방송국의 분위기도 TBC는 나훈아와 밀착하고 MBC는 남진과 밀착하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나훈아는 1972년에 <물레방아 도는데>와 <고향역>이라는 양대 히트곡을 탄생시켰고, 남진은 그 유명한 <님과 함께>라는 초메가 히트곡을 탄생시켰습니다. 특히 나훈아가 지구레코드로 전격 이적하고 박춘석 작곡가와 손을 잡으면서 일으킨 나비효과로 인해서 남진과 남국인 작곡가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그 유명한 <님과 함께>의 탄생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1972년에 TBC 방송가요대상에서는 나훈아가 <남자가수 대상>을 수상했고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는 남진이 <최고 인기가수>를 수상했습니다. 가요대상 트로피를 한 개씩 나눠 가졌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무승부였지만, 당대의 가요계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최고 인기가수>가 진정한 가수왕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남진이 판정승을 거둔 것으로 인식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리고 1973년에는 남진이 <그대여 변치마오>의 인기에 힘입어서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최고 인기가수>와 TBC 방송가요 대상의 <남자가수 대상>을 모두 휩쓸면서 ‘3년 전쟁’의 승자로 등극했습니다. ‘3년 전쟁’의 승자였던 남진은 1960~70년대의 가요계 역사에서 이미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후 나훈아는 1973년에 군대에 입대했고, 남진은 1975년까지는 건재하게 활동하다가 1976년 이후부터는 정상에서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 중후반에 남진과 나훈아는 모두 사실상의 잠정 은퇴 상태가 되었고, 남진과 나훈아가 모두 가요계를 떠나 있던 그 시절에도 이미자는 여전히 전통가요의 여왕으로서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미자는 1966년부터 1979년까지 14년 연속으로 MBC 10대가수 가요제에 단골손님으로 출연해서 무려 열두 차례나 10대가수에 선정됐고, 두 차례의 특별가수상을 수상했습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조용필이 새로운 시대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로 등극했습니다.
1980년대 초반에는 남진과 나훈아가 다시 가요계로 복귀하면서 제2의 가수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남진과 나훈아의 대결 구도에서 처음으로 역전이 이루어진 시점이 1982년이었습니다. 당시는 조용필의 시대였지만, 여전히 조용필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도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었고, 어르신들 사이에서 전통가요에 대한 수요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나훈아는 이미자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전통가요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고, 1980년대부터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가요계를 대표하는 전설들의 서열은 조용필, 이미자, 나훈아의 순서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인터넷 공간에서는 남진, 나훈아, 조용필 세 분의 팬들이 열성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댓글창의 분위기를 유심히 관찰해보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남진의 팬들과 조용필의 팬들이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구도는 거의 보기 힘든 반면에 남진 vs 나훈아, 나훈아 vs 조용필의 대립구도는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일부 극성팬들 사이에 험한 말이 오가는 모습도 빈번하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남진의 전성기 시절에는 조용필이 아직 전성기를 맞이하지 못했던 시절이었고 조용필의 전성기 시절에는 남진의 전성기가 지났던 시절이었습니다. 남진이 가요계의 황제로 집권했던 기간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약 5년 안팎의 기간이었고, 조용필이 가요계의 황제로 집권했던 기간은 1980년대 이후부터 약 40년 이상의 세월동안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오며 사실상의 ‘종신집권 황제’나 다름없는 위상을 확보했습니다. 남진과 조용필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할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도 특별히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반면에 나훈아는 남진의 전성시대에도 남진의 아성에 강력하게 도전하는 2인자 같은 느낌의 ‘공동 황제’ 같은 그런 위상을 누리고 있었고, 조용필의 전성시대에도 나훈아는 조용필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별도의 영역을 지배하는 ‘전통가요의 황제’로서의 위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나훈아는 남진, 조용필 양쪽과 모두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1인자의 아성에 도전하는 매우 강력한 2인자로서의 지위를 수십년째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나훈아의 팬들은 남진, 조용필 양쪽의 팬들과 모두 대립구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사실 남진과 나훈아 양쪽의 팬들은 결코 서로를 선의의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짓밟아서 깔아뭉개야 할 상대로 여기고 진심으로 험한 말을 주고받으면서 싸워왔습니다. 하지만 양측의 팬들이 진심으로 상대방을 깔아뭉개기 위해 그렇게 싸워댔던 것이 매스컴에 의해 증폭되면서 결과적으로는 남진과 나훈아, 두 사람이 모두 끊임없이 존재감이 부각되어 왔습니다. 당사자들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적대적 공생관계가 되었던 것입니다.
실제 당사자인 남진과 나훈아, 두 가수의 사이도 젊은 시절에는 불편하고 껄끄러운 관계였습니다. 주변에서 대놓고 싸움을 붙여대고 매스컴에서 그렇게 떠들어대니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던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서 인생의 황혼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고 보니까 두 사람 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그 시절에 참 재미있었다”며 웃어넘길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된 것입니다.
사실 1970년대 당시에는 기자들이 특종 한번 잡아보겠다고 남진과 나훈아 두 사람 사이에서 열심히 싸움을 붙이고 이간질도 시켰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유명한 연예부 기자였던 이상벽 씨도 그렇게 싸움을 붙였던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서 1990년대 초반에는 나훈아와 이상벽이 함께 방송에 출연해서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그 시절에 대해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생겼습니다.
나훈아는 바로 옆자리에 앉은 이상벽 씨를 가리키면서 이상벽 씨가 중간에서 싸움도 붙였다가 화해도 시켰다가 했다는 언급을 하고,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참 재미있는 시절이었고, 황금기였다는 언급을 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이상벽 씨가 본인이 열심히 싸움을 붙이고 다녔던 시절에 대해서 신나게 썰을 풀어놓기도 했습니다.
2010년대 이후에 방송에 자주 출연하기 시작한 남진도 나훈아와의 라이벌 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수십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까지도 이렇게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이 참 고마운 일이다”라는 답변을 남기면서 그 시절을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남진과 나훈아, 두 당사자들은 이제 과거의 일에 대해서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생겼지만, 아직도 인터넷 댓글창에서는 일부 극성팬들이 1970년대와 80년대의 기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험한 말을 주고받으면서 싸우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습니다.
남진과 나훈아의 양쪽 팬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날 때는 양측 모두 서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부분의 수상 기록만 내세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로 남진의 팬들은 1970년대 초반에 남진이 MBC에서 3년 연속 가수왕을 수상했다는 사실을 내세우고, 나훈아의 팬들은 2000년대 초반에 나훈아가 MBC 명예의 전당 가수 부문에 헌액됐다는 사실을 내세우고 있죠.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최고 인기가수>의 역대 수상 기록에서는 조용필이 통산 6회 수상으로 1위, 이미자와 남진이 통산 3회 수상으로 공동 2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 3년동안 거행됐던 <MBC 명예의 전당> 행사에서 가수 부문 헌액자로는 2000년 제1회 명예의 전당에서 조용필, 2001년 제2회 명예의 전당에서 나훈아, 2002년 제3회 명예의 전당에서 이미자가 헌액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자와 조용필은 전성기 당시에도 가수왕을 독차지하며 가요계의 제왕으로 군림했고, 전성기가 지난 이후에도 여전히 가요계의 독보적인 존재로서 건재함을 과시하며 명예의 전당에 오른 것입니다. 그런데 남진과 나훈아 양측의 극성팬들끼리만 서로 ‘가수왕’ 수상 기록과 ‘명예의 전당’ 헌액 기록 중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부분만 부각시키면서 인터넷 댓글창에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가요계에서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의 기간 동안에는 이미자가 독보적인 여왕이었고 1980년대 이후부터는 조용필이 영원불멸의 가수의 왕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전통가요를 대표하는 인물로 이미자와 남진이 투톱 체제를 형성했고, 1980년대 이후부터는 전통가요를 대표하는 인물로 이미자와 나훈아가 투톱 체제를 형성해 왔습니다.
남진과 나훈아는 이미자, 조용필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전성기가 짧은 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스컴에서 남진과 나훈아의 대결구도를 끊임없이 부각시켜준 덕분에, 노이즈마케팅 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매스컴에서 싸움을 붙여준 덕분에 남진과 나훈아 두 사람이 모두 수혜자가 되면서 이미자, 조용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전설로 존재감이 부각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남진 편과 나훈아 편의 멘트가 겹치는 부분입니다. 대한민국의 대중가요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라이벌 구도와 그 시대적인 배경을 설명하려다 보니까, 불가피하게 중복되는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략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남진과 나훈아, 두 사람의 각자의 가수 인생에 대한 내용을 따로따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의 내용은 후속편에서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나훈아의 가수 인생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인터넷에서 검색을 통해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프로필에서는 나훈아가 1947년생이고 1966년에 가수로 데뷔하면서 데뷔곡으로 <천리길>을 발표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나이와 데뷔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가 않고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음악평론가 최규성 씨의 칼럼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1966년에 발표했다는 나훈아의 데뷔 음반은 실체가 확인되지 않았고, 지금까지 수집된 자료나 몇몇 유명인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나훈아의 데뷔 시기는 1968년이 유력한 것으로 추정되며 실제 나이도 1950년생이라는 설도 있고 1951년생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실제 나이가 오히려 조용필보다도 한 살이 어리다는 이야기도 있기는 한데, 호적상의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출생신고가 늦게 되어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사실 이제 와서 남진, 나훈아, 조용필 세 분의 나이나 선후배 관계 같은 족보를 따지는 것 자체는 그렇게까지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워낙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분들이다 보니까 데뷔 년도를 정리하거나 데뷔 음반을 발굴하는 자체가 역사 자료를 정리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나훈아의 데뷔 음반에 대한 자료 확보가 100% 정확하게 고증이 이루어지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까지 확보된 자료에 의하면 나훈아의 실제 데뷔 시기는 1968년이 유력해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조용필과 데뷔 동기가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진다면 조용필도 솔로가수로 데뷔 음반을 발표한 시기는 1970년대 초중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남진, 나훈아, 조용필 세 분의 족보를 굳이 정리하자면 일단 나훈아는 남진보다는 후배, 조용필보다는 선배인 것이 맞습니다.
나훈아의 가수 데뷔 당시의 소속사는 오아시스레코드였고, 데뷔 년도는 1968년으로 추정되며, 첫 히트곡은 <천리길>, 본격적인 출세작은 <사랑은 눈물의 씨앗>.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훈아의 데뷔 년도나 데뷔 음반에 대한 부분은 최규성 씨의 칼럼에서 정리된 부분을 참고했습니다.
그렇기는 한데, 우리나라의 전설의 국민가수들의 데뷔 년도에 대한 프로필 자료가 각 포털 사이트 또는 신문 기사마다 조금씩은 혼선이 있습니다. 그래도 현재 공식 석상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데뷔 년도 카운트에 따르면 패티김은 1958년 데뷔, 이미자는 1959년 데뷔, 남진은 1964년 데뷔, 나훈아는 1966년 데뷔, 조용필은 1968년 데뷔, 이렇게 카운트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레전드 국민 가수 다섯 분의 데뷔 50주년은 각각 패티김 2008년, 이미자 2009년, 남진 2014년, 나훈아 2016년, 조용필 2018년 이렇게 카운트되고 있습니다.
2020년 4월 1일에 유차영 씨가 <농민신문>에 기고한 칼럼 내용에 따르면, 나훈아의 출세작인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발표할 당시에 발매한 음반에는 손석 작사, 유용현 작곡으로 표기되었다고 합니다. 실제 작곡자와 작사자는 <지구레코드> 소속의 김영광 작곡가가 작곡을 맡았고, 남국인 작곡가가 작사를 맡았습니다. <지구레코드> 소속의 작곡가들이 경쟁사인 <오아시스레코드> 소속의 가수인 나훈아에게 곡을 써주는 상황이 발생하다 보니까, 음반에 본명을 표기하기가 껄끄러운 상황이 되어서, 작곡자와 작사자의 이름을 각각 <오아시스레코드> 손진석 사장과 유현석 상무의 예명으로 표기했다고 합니다.
나훈아는 1969년에 첫 출세작인 <사랑은 눈물의 씨앗>의 히트에 힘입어서 본격적으로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나훈아는 1969년에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생애 처음으로 10대가수에 선정되었습니다. 나훈아는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1969년부터 1972년까지 4년 연속으로 10대가수에 선정된 후, 10년 후인 1982년에 통산 다섯 번째로 10대가수에 선정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1981년에도 출연해서 한 차례 ‘특별가수상’을 받은 경력이 있습니다.
나훈아는 데뷔 초창기에 배호와 닮은 창법으로 비교대상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시피, 월남전 파병을 나가 있던 남진과도 비교대상에 오르며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나훈아는 배호와는 닮은꼴 캐릭터로 비교대상에 올랐고, 남진과는 정반대의 캐릭터로 비교대상에 올랐습니다. 데뷔 초창기에 남진은 최희준의 닮은꼴 창법으로 주목받았고, 나훈아는 배호의 닮은꼴 창법으로 주목받았습니다.
남진과 나훈아에 대해서 다루는 여러 자료들을 보면 나오는 공통적인 레퍼토리들이 있습니다. 남진은 세련된 팝스타일의 노래들을 많이 불렀고, 나훈아는 정통 트로트를 고수했다는 내용입니다. 남진에게 영향을 준 최희준의 창법이 세련된 팝스타일이었고, 나훈아에게 영향을 준 배호의 창법이 정통 트로트 창법이었습니다. 최희준의 캐릭터를 계승한 후계자가 남진, 배호의 캐릭터를 계승한 후계자가 나훈아였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매스컴에서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에 대해서 다룰 때 공통적으로 나오는 레퍼토리들이 있습니다. 남진이 먼저 인기를 얻은 뒤,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남진이 군입대로 공백기를 맞이했고, 그 사이에 나훈아가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남진의 라이벌로 떠올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진이 월남전 파병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본격적으로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대결이 펼쳐지기 시작했다는 설명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의 전반적인 가요계 판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매스컴에서 라이벌 구도에 대해서 설명하는 방식은 마치 남진과 나훈아 두 사람 이외의 나머지 가수들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물론 ‘라이벌’이라는 키워드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시청률과 흥행을 보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너무 지나치게 흥미 위주로만 흐르다 보니까 본질을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쳐서 가요계의 전체적인 판도에 대해서 살펴보려면 이미자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자와 함께 패티김도 양대산맥을 이루기는 했지만, 패티김은 국내 활동보다는 해외 활동에 좀 더 무게중심을 두고 있었고, 국내 무대는 사실상 이미자의 독무대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자의 1인 독주체제가 지속되는 가운데, 1960년대 후반에는 배호의 인기가 일종의 신드롬과 같은 현상을 일으켰고, 최희준도 꾸준하게 인기를 얻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매스컴에서는 남진이 군입대 전 당대 최고의 스타였다가 남진의 군입대 후 나훈아가 양대산맥으로 떠올랐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까지는 아직까지 이미자와 배호의 인기가 건재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남진의 군입대 직전이었던 1967년까지의 상황만을 놓고 본다면, 이미자가 독보적인 1인자였고 배호 열풍도 뜨겁게 불던 상태에서 남진은 이제 막 스타덤에 오르며 서서히 존재감을 알리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정작 남진이 최고의 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한 시점은 월남전 파병 이후입니다. 남진이 군입대 전에 발표했던 노래들이 남진이 월남전 파병을 나가 있는 동안에도 꾸준하게 인기를 얻고 있었고, 심지어 1969년에는 여전히 남진이 국내에 부재중인 상태에서도 <TBC 방송가요 대상>의 남자가수 대상을 수상하는 저력을 발휘하기까지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인기 가수들이 아직 정상에서 내려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자는 여전히 1960년대 후반의 MBC와 TBC의 가요대상을 석권하고 있었고, 1970년대에 들어서도 <아씨>와 <여로>와 같은 국민드라마의 주제곡을 부르며 뜨거운 사랑을 받았습니다. 전설의 가객 배호의 노래들도 뜨거운 사랑을 받았고, 거기에 배호에 대한 추모 열기도 뜨거웠습니다.
여전히 이미자와 배호의 인기가 건재한 상태에서, 월남전 참전중인 남진은 국내에 부재중인 상태에서도 이미자, 배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존재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이미자가 중천에 떠 있는 해였다면 남진은 이제 막 떠오르는 해였습니다. 남진의 공백기 동안 나훈아의 인기가 서서히 오르며 남진과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남진과 나훈아 두 사람 모두 이미자의 아성에 도전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1971년에 남진이 베트남에서 귀국하면서 매스컴의 대대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최고의 슈퍼스타의 귀국에 관심이 쏟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단지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월남전 참전용사의 프리미엄을 등에 업고 마치 개선장군처럼 팬들 앞에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매스컴에서는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를 조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싸움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는 1971년부터 1973년까지 3년간 뜨겁게 달아오르며 과열 양상을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지구레코드와 오아시스레코드라는 양대 기획사의 신경전이 발단이 되었지만, 양측의 대립구도가 흥행이 되기 시작하니까 매스컴에서 대놓고 싸움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의 연예부 기자들은 특종을 잡기 위해서 남진과 나훈아의 사이를 일부러 이간질까지 시켜가면서 어떻게든 이슈를 만들어내려고 애썼습니다.
3년 동안 대한민국 전체가 마치 집단최면에라도 걸린 듯, 남진과 나훈아에 대한 뉴스가 대한민국의 모든 이슈를 점령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매스컴에서도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다른 가수들을 마치 투명인간처럼 취급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그 유명한 이미자마저도 남진, 나훈아의 ‘3년 전쟁’이 벌어졌던 기간 동안에는 일시적으로 이슈에서 소외되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매스컴에서 열심히 싸움을 붙이다 보니까 양측의 팬들 사이에도 신경전이 과열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남진과 나훈아 양측의 일부 극성팬들은 상대편 가수의 공연장에서 욕설과 야유를 퍼붓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극성팬 때문에 중간에서 애꿎은 가수들이 피해를 입으며 마치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것 같은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인기 절정의 여가수였던 하춘화도 남진과 나훈아 양측의 극성팬들 때문에 상당한 시달림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3년 동안은 마치 대한민국 연예계에 남진과 나훈아만 존재하는 것처럼 과열 양상을 보이다가 1974년 이후부터는 라이벌 대결이 종료되면서 매스컴의 관심도 서서히 식어갔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는 마치 ‘3년 전쟁’을 방불케 할 만큼 한순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어느 순간 열기가 확 식었습니다. 1974년 이후부터는 라이벌 구도가 시들해지기 시작하면서 유행이 빠른 속도로 급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튼 다시 1971년의 상황으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나훈아는 1971년에 <찻집의 고독>, <가지 마오>, <머나먼 고향>, <해변의 여인>, <기러기 남매>, <두줄기 눈물> 등의 히트곡들을 연달아 탄생시키며 연말 가요대상 수상에 대한 야심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71년 여름에 남진의 귀국과 함께 매스컴에서는 남진과 나훈아의 대결구도를 본격적으로 조성하기 시작했고, 방송 무대뿐만 아니라 리사이틀 무대와 같은 장외 대결까지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나훈아는 1971년 연말에 MBC와 TBC 양대 방송국의 가요대상을 모두 남진에게 내주며 뼈아픈 패배를 맛봐야 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나훈아의 팬들은 수십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뼈에 사무친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나훈아의 팬들은 여전히 당시의 가요대상 시상식이 공정하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나훈아의 팬들이 억울함을 토로하는 것도 일리가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나중에 남진 편을 업로드할 때는 남진 팬들의 입장에서도 이야기를 하겠지만, 여기는 나훈아 편인 만큼 나훈아 팬들의 입장에서도 한번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우선 1971년 한 해 동안 가장 꾸준한 활동을 펼치며 가장 많은 히트곡을 배출한 가수는 나훈아였습니다. 그런데도 남진이 귀국한 시점부터 TV 방송의 스포트라이트가 남진에게 집중되면서, 결국 양대 방송사의 대상까지도 모두 남진이 독차지하게 되었는데, 이는 불공평한 특혜라는 주장입니다. 여기에 남진의 소속사에서 팬클럽을 조직적으로 운영하면서 조직력 싸움에서 남진 측에 밀렸다는 이야기들도 나훈아의 팬들 사이에서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인기가 많은 가수가 스타 대접을 받고 가요대상을 타는 것이 당연한 거 아니냐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기는 합니다. 당대의 가요계에서 가수로서의 인기만을 따진다면 이미자의 인기가 절대적이었고, 가수 겸 배우로서 만능 엔터테이너로서의 인기는 남진의 인기가 절대적이었습니다. 실제로 얼마나 활발히 활동하고 얼마나 히트곡을 많이 내느냐의 여부와 관계없이 남진이 당대의 연예계에서 최고의 슈퍼스타 대접을 받았던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떤 가수가 그냥 인기가 많은지의 여부와 1971년의 가요대상 수상자의 자격이 있느냐의 여부는 좀 다른 문제입니다. 나훈아는 1971년 한 해 동안 가장 많은 히트곡을 배출한 가수였기 때문에 1971년 가요대상의 수상 기준에 가장 부합하는 가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냥 남진이라는 연예인이 인기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1년 중 절반에도 못 미치는 활동을 했는데도 대상을 수상한 것은 불공평하다는 것이 나훈아 팬들의 주장입니다.
나훈아의 팬들이 이렇게 억울함을 호소하는데도 불구하고, 당대의 가요계나 연예계에서는 이러한 호소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남진이 월남전 참전용사의 프리미엄을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옛날 흑백 자료화면에서 자주 등장했던, 남진의 <GI 블루스> 무대 공연 장면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는 단서입니다.
물론 나훈아라는 가수는 항상 “가수는 노래로 승부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고, 나훈아의 팬들도 이러한 소신을 적극 지지하고 있습니다. 가수의 성적을 평가해서 대상을 수상하는 기준에 ‘군대’라는 변수가 개입된다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주장이 충분히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남자 가수의 인기에 ‘군대’라는 변수가 미치는 영향력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오늘날 10대부터 40대까지의 연령대의 사람들은 21세기에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한번 생각해본다면 좀 더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한때 문희준은 안티들한테 지독한 시달림을 받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2005년 군입대와 함께 이미지가 좋아지기 시작했고, 2008년 군대에서 제대한 이후부터는 ‘문보살’이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사실상 ‘평생 까임방지권’을 얻었습니다.
유승준은 한때 인기 절정의 슈퍼스타였지만, 2002년의 ‘그 일’이 있었던 이후부터는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자체만으로도 후폭풍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싸이는 한때 병역비리로 인해 가수 생명 자체가 끝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군대에 두 번 다녀오면서 이미지를 쇄신하고 여론을 반전시켰습니다. 그리고 싸이는 훗날 월드스타로 등극한 이후에도 ‘군대 두 번 다녀온 싸이’라는 이미지를 적극 어필하고 있습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데, 하물며 1971년 당시의 상황에서 월남전 참전용사에 대한 프리미엄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당시에 나훈아 팬들이 아무리 억울함을 호소해도 상대가 월남전 참전용사였기 때문에 별다른 논란이 되지 않고 넘어갔던 것입니다. 이는 가수의 인기에 ‘군대’라는 변수가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미 수십년 전의 일이고 결과가 번복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1970년대 초반 당시의 연예계에서 가수 겸 배우로 종횡무진 활약하면서 만능 엔터테이너였던 남진이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 대접을 받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971년 연말 가요대상 시상식의 시상 기준에 부합하는 활동 실적을 올린 가수는 나훈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진은 귀국과 함께 ‘월남전 참전용사’의 프리미엄을 등에 업고 TV 브라운관에서의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며 나훈아를 제치고 연말 가요대상까지 석권한 것이었습니다.
이듬해인 1972년에는 남진과 나훈아의 대결이 더욱 과열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1972년에 나훈아는 <고향역>, <녹슬은 기찻길>, <물레방아 도는데>, <감나무골>, <흰구름 가는 길> 등의 히트곡들을 탄생시켰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양대 히트곡은 <물레방아 도는데>와 <고향역>이었습니다.
1972년에 나훈아는 <물레방아 도는데>와 <고향역>의 양대 히트곡으로 승부했고, 남진은 <님과 함께>라는 초메가 히트곡으로 승부했습니다. 히트곡의 수에서는 나훈아가 남진보다 앞서 있었지만, 나훈아에게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나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같은 확실한 대표곡이 없었던 것이 아쉬웠던 시절이었습니다.
1972년 연말 가요대상 시상식에서 <TBC 방송가요대상>에서는 나훈아가 남진을 제치고 ‘남자가수 대상’을 수상했으며,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는 남진이 나훈아를 제치고 ‘최고 인기가수’를 수상했습니다. 트로피를 한 개씩 나눠 가졌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무승부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당대의 가요계에서는 MBC의 대상 수상자가 ‘가수왕’으로 불리며 좀 더 높은 권위를 지닌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1972년에도 사실상 남진의 판정승과 마찬가지의 분위기였습니다.
나훈아는 1972년 연말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대세가 남진 측으로 기울자, 시상식에 출연하지 않고 월남 위문공연을 떠났습니다. 이때 나훈아는 방송국에 의해 ‘괘씸죄’에 걸려서 출연정지 징계를 당했다가 나중에 징계가 해제되는 등의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후 1973년에 나훈아가 군대에 입대하면서 남진과 나훈아의 ‘3년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1973년 연말 양대 방송국의 가요대상 시상식에서는 이미 나훈아가 경쟁구도에서 이탈한 상태에서 남진의 무혈입성이 이루어졌습니다.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에서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고정관념을 거꾸로 뒤집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일반적인 경우에 인기 절정의 가수가 군대에 입대하는 것은 가수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위기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에 대해서 매스컴에서 다룰 때도 대부분의 매체에서는 남진의 군입대로 인한 공백기에 나훈아의 인기가 급상승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치 남진의 군입대 덕분에 나훈아가 수혜자가 되었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설명 방식이었습니다.
실질적으로는 오히려 그러한 고정관념과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남진은 군대에 입대하기 전보다 입대한 이후에 오히려 인기가 상승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훈아는 남진의 군입대로 인한 수혜자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습니다. 1970년대 초반에 나훈아가 한창 상승세를 타려던 무렵에 남진이 군대에서 제대하면서 ‘월남전 참전용사’의 프리미엄을 등에 업고 나훈아의 상승세를 꺾었던 것입니다.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진행되었던 남진과 나훈아 라이벌 시대의 ‘3년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군대’로 시작해서 ‘군대’로 끝났습니다. 1971년에 남진이 군대에서 제대하면서 라이벌 대결의 막이 올랐고, 1973년에 나훈아가 군대에 입대하면서 라이벌 대결이 막을 내렸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군대’라는 변수에 의해서 남진은 이득을 봤고 나훈아는 손해를 보는 구도였습니다.
당시 ‘3년전쟁’의 승자였던 남진은 모든 영광을 독차지하고 있었고, 패자였던 나훈아는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매스컴에서 ‘선의의 경쟁자’로 아름답게 포장하려 하는 것과 달리, 실질적으로는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는 ‘적대적 공생관계’에 더 가까웠습니다. 양측의 팬들 사이에서는 감정 대립이 과열되면서 후유증을 남기기도 했지만, 정상급 가수로서 도약하는 데 있어서는 남진과 나훈아 모두 결과적으로는 라이벌 구도 조성의 수혜자가 되었습니다.
남진과 나훈아가 각자 따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가요계에 이미자라는 독보적인 여왕의 존재가 있었고, 그 어느 누구도 이미자의 아성을 넘볼 수 없었습니다. 이미자라는 절대강자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2인자 자리를 놓고 최희준, 배호, 남진, 나훈아가 경합을 벌이는 구도였습니다.
하지만 1971년부터 1973년까지 남진과 나훈아의 ‘3년 전쟁’이 벌어졌던 기간 동안만큼은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에 언론 매체와 대중들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가요계의 여왕이었던 이미자가 잠시 스포트라이트에서 소외되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남진에 이어서 나훈아도 영화배우 활동에 뛰어들게 되면서, ‘3년 전쟁’ 기간 동안 남진과 나훈아는 이미자와 조용필에게조차도 부러움을 살 만한 ‘만능 엔터테이너’로서의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했습니다.
1974년 이후부터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의 열기가 시들해지기 시작하면서 가요계의 유행도 급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존의 가요계 여왕이었던 이미자는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는 가운데, 1970년대 중반까지는 김추자, 하춘화, 송창식, 양희은 등이 전성기를 누렸고,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혜은이, 이은하, 최헌, 조경수, 송대관 등의 새로운 인물들이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1976년에 나훈아가 군대에서 제대한 이후에는 가요계 판도에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쳤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대마초 파동’이 한바탕 휩쓸고 갔던 시절이었죠. 1970년대의 가요계를 지배했던 남진, 나훈아, 김추자, 하춘화, 송창식, 양희은 등의 인기가 서서히 하락해 가던 시점에서, 기존의 가요계 여왕이었던 이미자만이 유일하게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에 접어들면서는 조용필이라는 새로운 슈퍼스타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 중후반 무렵에 남진과 나훈아는 공식적으로 은퇴 선언을 한 것은 아니고, 간헐적으로 신곡을 발표하거나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하는 등의 활동은 종종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활동은 거의 없었고, 사실상 반은퇴 상태나 다름없는 공백기를 가졌습니다. 남진과 나훈아 두 사람 모두 각자 개인사업에 몰두하기도 했고, 남진은 아예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나훈아의 과거 경력을 조사하기 위해 검색을 하다 보면 위키백과에서는 1970년대 중후반에도 음반을 발표한 기록이 나오기는 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과거 신문기사를 검색해 보면 다수의 기사에서 1973년 군입대 이후 8년간의 공백기를 가졌다가 1981년 겨울에 컴백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유튜브에 동영상이 공개되어 있는 1992년 KBS의 토크쇼인 <밤으로 가는 쇼> 3부작에서도 당시 패널이었던 전영호 씨가 3일 연속으로 나훈아에게 ‘대전에서의 8년’에 대해 질문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합니다.
나훈아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 사이에 가요계 컴백 준비를 하다가 1981년 겨울에 <대동강 편지>를 발표하면서 복귀했습니다. 나훈아는 1981년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특별가수상’을 수상했습니다. 1982년에 <대동강 편지>는 KBS <가요톱텐>에서 2주 연속 1위를 차지했는데, 이는 텔레비전 가요 프로그램에서 나훈아가 유일하게 1위를 수상한 기록이었습니다.
1982년에 나훈아는 <울긴 왜 울어>, <잡초> 등의 히트곡을 연달아 배출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1982년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나훈아는 10년 만에 통산 다섯 번째로 ‘10대가수상’을 수상했습니다. 1982년 <MBC 10대가수 가요제>는 나훈아가 텔레비전의 가요대상 시상식에 마지막으로 출연했던 시상식입니다.
한편 1982년에는 남진의 가요계 컴백도 이루어지면서 매스컴에서는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를 재점화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1982년 4월에서 5월 사이에 동아일보에서는 <명대결 - 나훈아와 남진>이라는 제목의 특집칼럼 시리즈를 11부작으로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1982년의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대결 2라운드는 사실상 나훈아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오늘날 매스컴에서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에 대해서 다룰 때는 대부분 두 슈퍼스타가 시종일관 용호상박의 일합을 겨뤘던 맞수였던 것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대결은 승자독식의 양상을 띠고 있었습니다. 승자가 모든 영광을 독차지하고 패자는 치명상을 입는 구도였습니다.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에서 최대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시점이 1라운드에서는 1972년, 2라운드에서는 1982년이었습니다. 1라운드의 하이라이트였던 1972년에는 남진이 완승을 거뒀고 나훈아는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2라운드의 하이라이트였던 1982년에는 나훈아가 완승을 거뒀고 남진은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1970~80년대의 전체적인 구도로 보더라도, 1970년대는 남진의 압승이었고 1980년대는 나훈아의 압승이었습니다.
[내용 추가]
1부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의 내용을 보충하겠습니다. 1980년대에 남진과 나훈아 두 사람은 각각 이미자와의 콜라보레이션 작업이 한 차례씩 성사되었고, 방송 무대에서 조용필과의 만남도 각각 한 차례씩 성사되었습니다.
1985년 8월에 이미자와 남진은 한국 가요의 대표곡 50곡을 부른 음반을 일본에서 출시했습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1985년 8월 7일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서 나오는 내용인데, 일본의 <낸킹레코드>사에서 <한국 가요의 계보를 듣는다>는 타이틀로 출시한 이 앨범에서는 이미자를 ‘한국 연가의 여왕’, 남진을 ‘베테랑 가수’라고 홍보했습니다.
1986년에 KBS의 <100분쇼>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이미자와 나훈아의 <2인 콘서트> 무대를 마련했습니다. 유튜브에는 이 공연 실황의 영상이 올라와 있습니다. <KBS Star TV: 인물사전>이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공개한 영상 자료입니다. 1980년대 이후로 한국의 전통가요를 대표하는 양대산맥으로 자리매김한 이미자와 나훈아, 두 사람이 함께 콜라보레이션 무대를 꾸몄던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1982년 <MBC 10대가수 가요제>에는 나훈아와 조용필이 출연해서 한 무대에 섰는데, 쉽게 보기 힘든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조용필은 새로운 시대의 가요계의 제왕으로 떠올랐던 시점이었고, 나훈아는 화려하게 복귀해서 전통가요의 황제로 자리매김했던 시점이었습니다. 이날 시상식의 대상 수상곡은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었습니다. 피날레 무대에서는 이용이 앵콜곡으로 <잊혀진 계절>을 불렀는데, 이용의 왼쪽에는 나훈아, 오른쪽에는 조용필이 자리를 잡고 <잊혀진 계절>을 함께 부르며 피날레 무대를 장식했습니다. 후배 가수의 대상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전설적인 대선배 가수들이 무대를 빛내주었던 아름다운 광경이었습니다.
1986년 12월에는 <KBS 가요무대 - 광주 시민과 함께>라는 특집 방송이 방영되었습니다. 유튜브에서는 <KBS 같이 삽시다>라는 채널을 통해서 이날 방송 자료의 영상이 공개되어 있습니다. 이날 방송 내용 중에는 가수들이 순서대로 제비뽑기를 통해서 팬들의 신청곡을 부르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조용필의 순번에서는 남진의 <가슴아프게>가 뽑혔고, 남진이 지켜보는 앞에서 조용필이 <가슴아프게>를 열창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1982년에는 가요계에서 나훈아가 먼저 컴백해서 자리를 잡고 있었고 남진도 곧 컴백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명대결 - 나훈아와 남진>이라는 제목의 칼럼 시리즈를 총 11부작으로 연재했습니다. 이 칼럼 시리즈에서 당시 미국 뉴욕에 체류 중이었던 남진과는 전화로 인터뷰를 진행했고, 국내에 체류 중이었던 나훈아와는 직접 인터뷰를 진행했었습니다.
1982년 5월 1일자 동아일보에는 <명대결 - 나훈아와 남진> 시리즈의 마지막회인 11회가 연재되어 있습니다. 칼럼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남진의 컴백을 앞두고 이에 대해 나훈아의 인터뷰 발언을 실으며 끝을 맺고 있습니다. 당시 칼럼 시리즈의 마지막 부분에 연재됐던 내용을 그대로 한번 옮겨보겠습니다.
그래서 흥행계에선 남진이 귀국하면 나훈아와 함께 하는 리사이틀을 준비 중이라는 소문도 나돈다. 나훈아는 이렇게 얘기한다.
“올 테면 빨리 와라. 그리고 조용히 올 게 아니라 뉴요크에서부터 떠들어대면서 와달라. 그래서 국내 가요계와 흥행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어보자.”고.
명대결 - 나훈아와 남진. 끝.
한편 1987년 KBS의 <스타데이트>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사상 최초로 남진과 나훈아의 동반 출연이 성사되었습니다. 이날 방송 자료의 몇몇 부분이 담긴 영상들이 유튜브 채널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남진과 나훈아는 전성기 시절에는 주변에서 하도 싸움을 붙여대다 보니까 실제로도 뭔가 껄끄럽고 불편한 관계였던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한참 흘러서 연륜이 쌓인 뒤에는 방송에 함께 출연해서 그 시절의 추억에 대해서 서로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오늘날의 10대부터 40대까지의 연령대의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부연설명을 덧붙이자면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만화나 영화, 드라마 등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스토리에는 이러한 장면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철천지 앙숙이었던 두 주인공이 세월히 한참 흐른 뒤, 젊은 시절의 대결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우리 참 좋은 시절 보냈지.” 하면서 회상하는 장면은 꽤나 빈번하게 사용되는 소재입니다.
남진과 나훈아가 바로 그런 관계였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실제로도 사이가 안 좋았던 시절이 분명히 존재했지만, 세월이 한참 흐르고 연륜이 쌓인 뒤에는 서로 함께 마주보고 웃으면서 “참 재미있는 시절이었다.”고 회상할 수 있는 그런 여유가 생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방송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을 기점으로 해서, 남진과 나훈아, 두 슈퍼스타는 비로소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게 됩니다.
1982년에 동아일보에서 <명대결 - 나훈아와 남진> 칼럼 시리즈를 연재할 당시에는 11부작 중 1부에서 4부까지의 내용을 1972년에 발생했었던 ‘나훈아 피습사건’에 관련된 내용으로 채웠습니다. 당시의 사건에 대한 내용은 오늘날까지도 언론 매체나 유튜브 등에서 빈번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소재입니다.
1992년에 KBS의 토크쇼 프로그램인 <밤으로 가는 쇼>에 출연했던 나훈아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직접 증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채널A의 <실화극장 그날>이라는 다큐 프로그램에서도 ‘나훈아 피습사건’에 대한 내용을 다룬 방송을 내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우선은 사건이 발생했던 당시의 신문기사를 그대로 옮겨보도록 하겠습니다. 1972년 6월 6일 조선일보의 보도 내용입니다.
가수 나훈아 군. 무대서 피습.
“이름 나고 싶었다.” 깨진 사이다병 휘둘러. 얼굴 찔러.
4일 밤 10시 45분쯤 서울시민회관 무대 위에서 노래하던 인기가수 나훈아 군이 관객 김웅철 씨가 휘두른 깨진 사이다병에 왼쪽 뺨과 왼쪽 귀 뒷부분을 찔려 66바늘을 꿰매는 중상을 입었다. 범인은 무대 위에 뛰어올라온 1백여 관객들에 붙들려 경찰에 인계됐고 나군은 곧 매니저 강창호 씨 등 동료들에 의해 비원 앞 돈화문 신경외과에 옮겨져 치료를 받은 뒤 귀가했다.
지난 3일부터 열린 톱스타 페스티벌 2일째 4회 공연 마지막 순서로 나군이 무대에 등장, 세 곡을 부르고 객석의 앙코르에 따라 <찻집의 고독> 1절을 끝냈을 때 무대 앞에서 김이 뛰어올랐다. 팬으로 생각한 나군이 핸드마이크를 왼손으로 옮기고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김은 왼손으로 잡아당기면서 오른손에 든 깨진 사이다병으로 나군의 왼쪽 뺨을 찔렀다. 기습을 당한 나군이 마이크를 떨어뜨리고 김의 얼굴을 한대 때려 쓰러뜨렸으나 김은 다시 일어나 나군의 왼쪽 귀 뒤를 찔렀다.
종로경찰서에 연행된 김은 “인기 연예인을 찔러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여 나도 유명해지고 싶었다.”면서 “사실은 영화배우 신성일을 찌르려 했는데 이날 나오지 않아 나훈아를 택했다.”고 말했다. 김은 부모 얼굴도 모르는 사생아로 중학 2학년 때까지 할머니와 함께 살다 할머니가 사망한 뒤 혼자 서울에 와 구두닦이, 식당, 각종 공사장에서 일하면서 떠돌아다녔고 작년부터 지하철공사장에서 일하다 20일 전 그만두고 놀고 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김을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하고 정신감정을 의뢰키로 했다.
이후 감옥에 수감됐던 테러범은 1973년 12월에 출소한 뒤 남진을 찾아가서 “나훈아를 찌른 것은 당신이 시켜서 한 것이라고 폭로하겠다.”며 공갈협박을 하고 금품을 갈취한 혐의로 다시 구속됐습니다. 범인은 감옥에 수감된 이후에도 계속 남진의 사주를 받았다는 주장을 계속했습니다. 이 때문에 1974년에는 가수분과위원회 주최로 남진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고, 당시 구속수감 중이던 범인이 경찰들의 호송을 받으며 이 기자회견 자리에서 남진과 대면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후에 여러 신문 보도나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서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이 일반 대중들에게도 꽤 많이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서는 1982년 동아일보의 11부작 칼럼 시리즈인 <명대결 - 나훈아와 남진>의 1부에서 4부까지의 내용을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테러범 김씨는 범행을 저지르기 전 남진의 자택을 찾아가서 먼저 난동을 부리고 협박을 했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오늘날의 10대부터 40대 정도까지의 나이대의 사람들은 그 시대의 배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남진의 자택이라고 말하면 그냥 자취방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당시 남진이 살고 있던 집은 혼자 사는 집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합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오늘날의 아이돌 그룹 멤버들의 합숙생활과는 좀 다른 형태입니다. 그 시절에는 유명인사의 집에서 그 사람을 따르는 동생이나 후배들이 함께 숙식하면서 합숙생활을 하는 문화가 있었고, 당시 남진의 자택에는 남진을 따르는 여러 동생들이 함께 합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테러범 김씨는 범행 하루 전날에 남진의 집을 찾아가서 남진을 꼭 만나야겠다며 난동을 부렸고, 그래서 그 집에 기거하던 동생들이 자기들 선에서 처리하려다가 하도 시달리는 바람에 남진의 앞에 김씨를 데려갔습니다. 이때 김씨는 남진에게 “당신의 라이벌 나훈아를 처리해줄 테니 돈을 달라” 운운하는 공갈협박을 했고, 남진은 웬 정신병자가 미친 소리를 하나 싶어서 거절하고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당시 남진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냥 귀찮아서 돌려보내기 바빴습니다.
그런데 이후 남진의 집에 살던 동생들이 테러범 김씨를 돌려보내는 과정에서 이 사람이 계속 찾아와서 귀찮게 하면 골치 아플 것 같다는 생각으로 돈 5천원 정도를 쥐어주고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거 먹고 떨어져라.”라는 뜻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테러범이자 정신병자였던 김씨가 다음날 나훈아에게 테러를 저지른 뒤, 남진의 사주로 돈을 받고 범행을 저질렀다는 주장을 하면서 대한민국 연예계가 발칵 뒤집혔던 겁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남진은 테러범 김씨에게 지속적으로 시달렸고, 나중에 김씨는 남진의 목포 생가에 불을 지르는 범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훈아의 팬들은 지속적으로 남진이 테러범을 사주했다는 주장을 했고, 당시 연예계에서 남진은 의심을 받으며, 많이 시달렸었는데, 결국 사실무근인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당시 나훈아가 수술을 마치고 자택에서 누워 있을 당시에 팬들이 찾아와서 이건 남진이 시킨 일이라는 말을 계속 했다고 합니다. 그때마다 나훈아는 아니라는 대답을 하긴 했지만, 불편한 감정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습니다. 적어도 범인의 입에서 나훈아를 처리한다느니 운운하는 말이 나왔다면 남진 측에서 미리 귀띔은 해줬어야 하는 게 아니냐며, 나훈아 측에서는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진도 처음에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고 방심했던 데 대해서 후회하는 심경을 여러 차례 표출하기도 했습니다.
1982년에 11부작 칼럼 시리즈인 <명대결 - 나훈아와 남진> 칼럼 시리즈를 작성했던 동아일보의 기자도 이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우선 당시 남진이 범인을 사주했다는 세간의 루머에 대해서는 사실무근이라고 확실하게 매듭을 지으면서도, 당시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귀찮다는 생각으로 대처했던 남진의 방심과 부주의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인 2015년 8월 5일에는 프리랜서 기자 신일하 씨가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취재 기사를 올렸습니다. 프리랜서 기자 신일하 씨의 블로그의 명칭은 <광화문에 소나무를 심자>이고, 이 블로그의 <신일하의 ENT 큐레이션>이라는 카테고리에 <나훈아 피습사건 의혹 풀렸다 - 타깃은 신성일>이라는 제목의 취재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프리랜서 기자 신일하 씨는 영화배우 고 신성일 씨의 옛 매니저였던 이종운 상무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을 해소하는 취재기사를 올렸습니다. 이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테러범 김웅철은 고 신성일 씨의 집에 몇 차례 찾아가서 행패를 부리고 신성일 씨의 매니저로부터 금품을 갈취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성일 씨의 매니저와 친분이 있던 남진의 매니저와의 충돌도 있었다고 합니다.
테러범 김씨는 1972년 6월 4일 범행 당일 신성일을 타깃으로 삼았는데, 술기운 때문에 졸다가 신성일의 무대 공연 타이밍을 놓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나훈아의 앙코르 무대 도중 난입해서 범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 인터뷰의 내용은 1972년 사건 발생 당시의 테러범 김씨의 최초 진술과도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 콘텐츠에서 인용한 1972년 6월 6일의 조선일보 기사에서도 “사실은 영화배우 신성일을 찌르려 했는데 이날 나오지 않아 나훈아를 택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은 완전히 해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사람들은 항상 싸움 붙이는 걸 좋아합니다. 오늘날에도 TV나 유튜브 등의 각종 매체에서는 당시의 사건에 대해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관계에 초첨을 맞추며 흥미 위주로 각색하며 자극적인 콘텐츠가 양산되고 있습니다. 테러의 피해자였던 나훈아는 평생 지속되는 트라우마를 겪고 있고, 루머의 피해자였던 남진은 여전히 인터뷰 때마다 이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일일이 해명을 하는 등의 시달림을 받고 있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당시의 시대 분위기는 연예인들이 불량배들에게 지속적으로 시달림을 당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과거 신문기사를 검색하다 보면, 1972년의 나훈아 피습사건뿐만 아니라 1989년의 남진 피습사건에 대한 기사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당시 남진은 테러범들에게 허벅지를 찔려서 부상을 당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1992년에 KBS의 토크쇼인 <밤으로 가는 쇼>에 출연했던 나훈아는 1972년 당시의 사건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에 대해서 증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1부에서 패널로 함께 출연했던 이상벽 씨도 예전 연예부 기자 시절의 일들에 대한 증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상벽 씨가 목격한 바에 따르면 나훈아의 공연장에는 항상 연예인들을 괴롭히는 불량배들이 지속적으로 쫓아다녔고, 이 때문에 나훈아는 당시 불량배들과 여러 차례의 마찰이 있었다고도 합니다.
오늘날 남진과 나훈아 두 사람은 사적으로 친분을 맺은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최소한 서로 간의 오해와 앙금은 풀고 어느 정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극성팬들 사이의 앙금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입니다. 오늘날 인터넷에서 지저분한 댓글을 주고받는 사람들은 예전에 현장에서 욕설을 주고받고 패싸움을 벌이던 그 시절의 기억에서 아직까지 헤어나오지 못하고 여전히 싸움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3부에서 계속됩니다.)
나훈아는 1982년에 MBC와 KBS 양대 방송국의 연말 가요대상 시상식에서 대상 타이틀을 두고 조용필, 이용과 3파전으로 경합을 벌였습니다. 최종 수상 결과에서 KBS에서는 조용필, MBC에서는 이용이 대상을 수상하면서, 나훈아는 대상 타이틀을 손에 넣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훈아는 1972년 이후 무려 10년 만에 연말 가요대상의 강력한 후보로 떠오르면서 이슈의 중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습니다. 이와 관련된 1982년 11월 24일 경향신문 기사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도록 하겠습니다.
82 가요 그랑프리는 누구에게.
두 방송 인기투표 의존 지양. 선정작업 신중.
조용필 3연승에 도전하는 이용, 나훈아.
윤시내 우세. 김연자, 현숙, 남궁옥분 추격.
신인 이명훈, 김영준, 나영, 김성희도 대열에.
최근 가요계는 82년의 10대가수와 가수왕의 영예를 누가 차지할 것이냐로 화제가 분분하다. 내달 초쯤 뚜껑이 열리게 될 <MBC 10대가수상>과 <KBS 가요대상>을 노리는 남녀 가수들은 막바지 각축전으로 피치를 올리고 있다. 양대 방송사가 연말의 가요계 최대 이벤트로 벌이는 인기가수 선정은 1년간의 가수활동, 디스크 판매, 팬들의 호응도 등을 종합해 가리는 것.
해를 거듭할수록 뜨겁게 달아오른 인기가수의 경쟁은 지난 2월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은 방송 PD들의 징계 사태를 낳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엔 방송사의 관계자들이 더욱 조심스럽고 합리적인 기준으로 선정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과연 올해는 어느 가수가 영예를 차지할까.
남자 가수는 인기 판도가 거의 뚜렷하지만 여자 가수의 경우는 도토리 키재기 식의 혼전을 벌이고 있어 누가 뽑힐지가 주목거리. 다만 남자가수 중에서는 팬들로부터 폭넓은 인기를 끌어 선두를 달려온 조용필이 80년, 81년에 이어 연속 3년 정상을 차지하느냐 아니면 다른 가수가 차지하느냐에 관심이 쏠려 있다.
지난 2년간 연속 가수왕을 차지해온 그는 금년 5월 <못 찾겠다 꾀꼬리>란 노래로 줄기찬 인기를 유지해 왔으며 지난 4월에는 세계적인 음향기기 메이커인 미국 암펙사로부터 골든릴 상까지 받아 국제적으로도 가창력을 인정받았다. 따라서 가요계에선 KBS <가요톱텐>에서 10주 연속 수위를 기록한 그가 금년에도 가수왕으로 뽑히지 않겠느냐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현재 조용필의 인기 아성에 도전하는 라이벌 가수는 <국풍 81>에서 <바람이려오>를 불러 데뷔한 후 히트송 <잊혀진 계절>로 10대 팬들을 사로잡은 신예 이용과 8년간의 긴 침묵을 깨고 지난해 11월 가요계에 컴백한 나훈아. 나훈아는 <울긴 왜 울어>를 히트시켜 만만찮게 추적하고 있어 다크호스로 꼽히고 있다.
이밖에 MBC의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지나간 시절의 연가>로 금상을 차지한 전영록, <부산갈매기>로 큰 바람을 일으킨 문성재를 비롯, 꾸준한 연예활동을 벌이고 있는 송창식, 윤형주, 함중아 등이 인기가수 대열에 포함돼 있다. 신인쪽으로는 이명훈, 김영준, 김민식 등이 손꼽힐 정도.
이에 비해 여자 가수의 경우는 지난 5월 내놓은 <DJ에게>라는 노래로 큰 반응을 얻고 있는 윤시내가 약간의 우세를 지킬 정도여서 누가 영예를 차지할지는 막판까지 가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현재 선두다툼을 벌이고 있는 여자 가수는 윤시내 외에 10명이나 된다. 흘러간 노래를 불러 올드팬들에게 인기를 모으고 있는 김연자, 율동의 가수 현숙, <꿈을 먹는 젊은이>의 남궁옥분, 디스코의 간판스타 이은하, 미모의 계은숙, 민해경, 한경애, 인순이, 하춘화 등이 혼전을 벌이고 있다. 이 중 김연자는 <노래의 꽃다발>, <노래의 올림픽>이란 흘러간 노래의 메들리 테이프와 레코드를 내놓아 2백만 개 이상이 팔리는 기록을 세웠으나 자기의 노래가 없다는 핸디캡을 안고 있다. 그녀는 이같은 핸디캡을 만회하려는 듯 지난 10월 <진정인가요>를 불러 정상 정복을 위한 포석을 마련했다.
또 <포장마차>를 불러 10월 전국 라디오 방송 1위를 차지,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는 현숙도 만만찮은 추적을 하고 있으며 남궁옥분, 이은하, 계은숙 등도 경쟁 대열에 끼어 고지 탈환을 노리고 있다. 이외에 신인으로는 나영, 금성희, 한지희, 김현지, 혜민, 임수정 등도 서서히 경쟁 대열에 나서고 있다.
장정낭 기자.
1980년대에 들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나훈아는 그 여세를 몰아서 1984년에는 일본 진출을 성사시켰습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검색을 통해서 1980년대 중반 나훈아의 일본 진출과 관련된 신문 기사를 몇 개 찾아볼 수 있는데, 그중에 경향신문 기사 두 개를 그대로 옮겨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984년 8월 8일 경향신문 기사입니다.
나훈아 새 앨범 내놔. 일본서 취입 요청도.
가수 나훈아가 새로운 환락가로 변모한 서울 영동을 주제로 한 <영동부르스>라는 새 앨범을 발표했다. 중견 작곡가 안치행 씨가 노래말과 곡을 붙였는데 이 노래가 크게 주목을 받자 일본의 데이지꾸 레코드 회사가 나군의 전속과 함께 일본어 취입을 제의해 왔다고.
지난 17일 서울에 온 데이지꾸 사장은 일본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대전부르스>가 잇달아 히트한 것으로 보아 가창력이 뛰어난 나군의 <영동부르스>도 큰 바람을 일으킬 것이라며 전속을 제의했으나 나훈아 측에서 3억엔을 요구해 타협을 보지 못했다.
다음은 1985년 6월 14일 경향신문 기사입니다.
일본의 데이구찌 레코드에 전속, 현지에서 활약하고 있는 가수 나훈아가 일시귀국해 15일 하오 7시 MBC TV <쇼 2000>에 출연, 한일 양국에서 동시에 발표한 신곡 <흰구름>, <애당초> 등과 자신의 히트송을 부른다.
1980년대야말로 나훈아의 실질적인 전성기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나훈아는 1970년대의 가수로 분류되고 있는 편이기는 하지만, 나훈아의 황금기는 1971년과 1972년 두 시즌에 집중되었고, 이후 8년간의 공백기를 가졌습니다. 1982년에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던 나훈아는 이후로도 1980년대 후반까지 거의 매년마다 꾸준하게 히트곡을 배출해 왔습니다. 오늘날 어르신들의 노래방 애창곡으로 꼽히는 히트곡 레퍼토리들도 1980년대에 나왔던 히트곡들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나훈아의 1980년대 이후의 대표적인 히트곡의 목록을 나열하자면 1981년 <대동강 편지>, 1982년 <울긴 왜 울어>, <잡초>, 1983년 <18세 순이>, <사랑>, 1984년 <붉은 입술>, <청춘을 돌려다오>, <영동부르스>, 1986년 <님 그리워>, 1987년 <사나이 눈물>, 1988년 <무시로>, 1989년 <갈무리>, 1990년 <영영> 등이 있습니다.
나훈아가 오늘날 트로트 가수 중에 흔히 찾아보기 힘든 ‘싱어송라이터’의 이미지로 자리매김했던 시점도 1980년대부터였습니다. 1970년대 초반에도 나훈아가 작사, 작곡에 참여했던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그 시절의 대다수의 인기 가수들과 마찬가지로, 나훈아 역시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는 당대의 유명 작곡가들에게 곡을 받아서 부르는 가수였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컴백한 이후부터 나훈아는 거의 대부분의 노래를 스스로 작사,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 초반 본인의 가수 인생에서의 황금기를 ‘박춘석 사단’의 일원으로 보냈던 나훈아가 1980년대에 들어서는 본격적으로 홀로서기에 돌입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싱어송라이터’에 대해서 찬사를 보내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곡가에게 노래를 받아서 부르는 가수들을 비하하게 될 경우, 1980년대 이전 전통가요의 전설의 국민가수들의 존재를 한꺼번에 부정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의 당대의 인기 가수였던 시절의 나훈아의 존재까지도 부정하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단순히 가수가 작곡을 할 줄 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면, 오늘날 언더그라운드에는 수많은 ‘싱어송라이터’가 존재합니다. 심지어 가수로 처음 데뷔하는 순간부터 작곡가의 곡을 일체 받지 않고 스스로 작사, 작곡을 도맡아 하는 ‘싱어송라이터’는 수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작사, 작곡을 할 줄 안다고 해서 그 자체만으로 위대한 뮤지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인이 작곡한 노래가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꾸준히 히트곡을 배출해야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나훈아 정도의 위치에 있는 가수라면 1970년대의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법도 합니다. 하지만 나훈아는 과거의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자기발전을 시도했습니다. 전성기 당시에 당대의 유명 작곡가들에게 곡을 받아서 노래를 부르던 가수가 무려 8년간의 공백기를 깨고 컴백한 이후부터 더 이상 작곡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완벽한 홀로서기를 했다는 것이 진정으로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대목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느 한 분야의 톱스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정상에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 잘 내려와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황 나훈아야말로 이러한 격언을 몸소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전성기로부터 무려 1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 오면서 생명력을 이어온 것이 가황 나훈아의 진정한 저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 등장했던 가수들 중에서 약 3년~5년 정도의 전성기를 보내며 당대 최고의 아이돌 스타로 군림하다가, 전성기가 지난 후 흔적도 없이 사라진 가수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나훈아는 오히려 전성기가 지난 시점에 끊임없는 생명력을 유지하며 롱런함으로써 자신의 진가를 발휘해 왔습니다.
1980년대 이후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며 전통가요의 황제로 군림해 왔던 나훈아였지만, 1982년 이후로는 더 이상의 가요대상 수상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나훈아에 대해서 그동안 잘 몰랐었던 젊은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가요 차트나 가요대상 수상 기록을 검색하는 것만으로는 나훈아의 경력이나 인기에 대해서 제대로 알기가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1980년대 이후의 나훈아의 인기는 주로 어르신들을 통해서 구전으로 전해 내려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1970년대나 1980년대의 가요대상 시상식의 결과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본래 가요대상 시상식에서 대상이라는 최후의 영광은 항상 당대의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누렸던 아이돌 스타의 차지가 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1970년대에는 당대 최고의 아이돌 스타였던 남진, 송창식, 혜은이 등이 가요대상 수상의 영광을 차지했고, 1980년대에는 당대 최고의 아이돌 스타였던 조용필, 이용, 김수철, 전영록, 변진섭 등이 가요대상 수상의 영광을 차지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중장년 세대의 인기를 얻는 트로트 가수들이 대상을 수상했던 사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1960년대에는 이미자가 있었고 1970년대에는 하춘화, 1980년대에는 주현미가 있었습니다. 나훈아가 1980년대에 트로트 또는 성인가요 부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요대상 시상식에서는 약간은 운이 따르지 않았던 측면도 있기는 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가요대상 시상식의 결과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가요대상 시상식이 10대 위주로 흘러간다거나 또는 아이돌 스타 위주로 흘러가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대한민국 인구 구조에서 과반수가 넘는 비중을 차지하는 중장년 세대 또는 노년 세대의 인구를 아예 투명인간 취급하는 듯한 분위기가 진짜 문제인 것입니다.
2020년의 예를 들어서 한번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2020년대 초반 현재는 방탄소년단의 시대라는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분명 10대와 20대에게 있어서는 방탄소년단은 그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스타입니다. 방탄소년단이 2010년대 후반에서 2020년대 초반까지 수년간 가요대상을 독차지한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5천만 국민 모두가 방탄소년단에게 열광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30대 또는 40대 이상의 나이를 먹은 사람들 중에는 오늘날의 아이돌 가수들에게 공감대를 느끼지 못하는 세대가 분명히 존재하고, 이들 세대를 중심으로 해서 온라인 탑골공원이라든지 슈가맨 등의 열풍이 불기도 했죠. 그리고 50대에서 60대 정도의 연령대의 세대는 신세대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르신이라고 불리기도 애매한 세대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트로트 열풍이 거세게 불어닥치기도 했습니다.
방탄소년단이 국내 무대를 넘어서 세계 무대를 호령하던 2019년에서 2020년 사이에도 연말 가요대상 시상식의 결과만으로는 체감할 수 없는 사각지대는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음악 시장에서 소외된 것처럼 보였던 세대의 대중들을 중심으로 해서 트로트 열풍이 거세게 불면서 송가인, 임영웅 등의 인기가 신드롬 수준으로 거세게 불어닥쳤지만, 이러한 분위기가 연말 가요 시상식에서는 잘 반영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60대 이상의 어르신 세대 중에서는 오늘날의 세미 트로트 열풍조차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대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서 여전히 이미자, 나훈아를 지지하고 있는 굳건한 팬층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미자, 나훈아 같은 가수 본인들도 오늘날의 세미 트로트 가수들과 한데 엮여서 ‘트로트 가수’로 불리는 데 다소의 거부감을 표현하면서 본인들을 ‘전통가요 가수’라고 불러달라는 요청을 했던 사례도 있었습니다.
2020년에 방탄소년단이 국내 무대에서 가요대상을 싹쓸이하고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며 해외의 각종 시상식에 초청을 받아서 세계를 누비던 그 순간에도 여전히 나훈아는 건재했습니다. 2020년 추석에 많은 사람들이 ‘나훈아 열풍’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바 있지만, 여전히 연말 가요대상 시상식의 결과를 검색하는 것만으로는 그 시대의 분위기를 정확하게 체감할 수 없는 사각지대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해보자면, 연말 가요대상 시상식의 결과는 당대의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대표적인 아이돌 스타가 누구였는지, 그 계보를 살펴볼 수 있는 지표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성기 시절에 가요대상을 싹쓸이했던 남진, 조용필, 방탄소년단은 당대의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대표적인 아이돌 스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요대상 시상식의 결과만으로는 체감할 수 없는 사각지대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고, 전통가요를 사랑하는 어르신들의 존재는 언제나 한결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어르신들의 사랑을 꾸준히 받아왔던 나훈아는 ‘전통가요의 황제’로서의 지위를 굳건하게 유지해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남진의 시대에도, 조용필의 시대에도, 방탄소년단의 시대에도 나훈아의 존재감은 언제나 한결같이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전통가요의 황제 나훈아의 존재감은 연말 가요대상 시상식의 결과만으로는 쉽게 체감하기가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나훈아의 인기는 수십년 동안 어르신 세대를 통해서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다가 2020년의 ‘테스형 열풍’을 계기로 해서 비로소 젊은 세대의 사람들도 그 실체를 직접 체감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지금까지는 나훈아의 가수 경력 중에서 주로 1970년대와 1980년대 위주로 조명을 해왔는데요. 1990년대 이후의 경력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좀 더 보충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훈아는 1990년대 이후에도 꾸준하게 히트곡을 배출해 왔으며, 콘서트 무대의 품질을 꾸준하게 업그레이드해 왔습니다. 1996년에는 일본에서 공연할 당시에 “독도는 우리땅”을 외치면서 국민들의 가슴을 통쾌하게 해줬던 사례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기도 합니다.
1996년에 나훈아는 KBS의 <설날 특별공연, 나훈아 빅쇼>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7억원어치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올라서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당시 이 무대의상에 관련된 내용은 기네스협회에 통보해서 기록을 인증받기도 했습니다. 1996년 2월 14일 경향신문 기사를 그대로 옮겨보도록 하겠습니다.
나훈아 7억짜리 다이아 의상 화제. KBS TV 빅쇼 출연 열창. 트로트의 황제 나훈아 씨가 7억원어치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올라 화제. 나씨는 13일 오후 7시 30분 여의도 KBS홀에서 녹화로 진행된 <설날 특별공연 나훈아 빅쇼>에 550개의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의상을 입고 100분간 자신의 히트곡을 열창했다.
비상이라고 이름지어진 이 의상은 귀금속 수입업자와 보석세공가, 패션 디자이너의 협찬을 받아 한 달에 걸쳐 제작된 옷으로 이날 경호를 위해 무술 고단자 6명이 동원되기도 했다. 나씨 측은 기네스협회에 이 사실을 통보, 기록을 인증받기로 했다.
글: 오광수. 사진: 우철훈 기자.
1999년에 나훈아는 신곡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를 발표하고 뮤직비디오를 촬영했습니다. 나훈아는 1999년에 <김혜수 플러스유>에 출연해서 이 노래를 공개했습니다. 해당 프로그램의 방송 내용 중 일부가 담긴 영상이 유튜브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이 방송에서 나훈아는 20대 젊은층으로 이루어진 관객들 앞에서 자신의 매력을 유감없이 드러냈습니다.
2000년대 이후에도 나훈아는 <홍시>, <아리수>, <고장난 벽시계> 등의 히트곡들을 꾸준히 배출해왔고, 세종문화회관에서의 공연도 여러 차례 개최했습니다. 2000년대 중반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던 나훈아는 악성 루머에 시달리다가 2008년 초에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당시 나훈아는 악성 루머를 퍼뜨린 기자들을 향해서 강력한 일침을 놓았습니다. 이 기자회견 이후로 나훈아는 약 10년 가까이 공백기를 가졌습니다.
2017년에 나훈아는 오랜 공백을 깨고 신곡 <남자의 인생>을 발표하며 복귀했습니다. 2008년 기자회견 이후 9년 만에 공식 석상에 등장한 것이고, 무대 공연 활동은 2006년 이후 11년 만의 복귀였습니다. 나훈아는 2016년에 데뷔 50주년을 맞이했었지만, 당시 공백기였기 때문에 데뷔 50주년 기념공연을 열지는 못했었습니다. 2017년의 나훈아 컴백 콘서트는 비록 데뷔 50주년 타이밍을 정확히 맞추지는 못했지만, 사실상의 데뷔 50주년 기념공연과도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후 매년 꾸준히 공연 활동을 이어오던 나훈아는 2020년 추석에 KBS의 특집 프로그램인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팬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나훈아는 코로나 때문에 지쳐 있는 국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훈아는 신곡 <테스형>을 발표하면서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테스형>은 나훈아의 21세기 대표곡으로 등극했습니다.
<테스형 신드롬> 이전과 이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테스형> 이전까지는 나훈아를 원래부터 좋아하던 어르신들이 꾸준하게 성원을 보내주었고, 젊은 세대에게는 다소 거리감이 있는 인물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020년 추석 공연과 <테스형> 신드롬을 계기로 해서 젊은 세대에게도 나훈아의 카리스마와 매력이 발휘되며 신선한 충격을 일으켰습니다.
이 콘텐츠를 작성하고 있는 2021년 현재, 나훈아는 데뷔 55주년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전설의 국민가수 다섯 분 중에서 데뷔 55주년을 맞이한 순서는 2013년 패티김, 2014년 이미자, 2019년 남진의 순서로 이어졌으며, 나훈아는 2021년에 데뷔 55주년을 맞이했고, 조용필은 2023년에 데뷔 55주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패티김은 데뷔 55주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했고, 이미자는 데뷔 60주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했습니다. 현재는 남진, 나훈아, 조용필 세 분만이 마지막까지 현역으로 남아서 데뷔 60주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대한민국의 현존하는 가수 중에서 데뷔 60주년을 넘겨서 65주년, 70주년까지 활동한 사례는 없었습니다.
2021년 현재 데뷔 55주년째를 맞이하고 있는 나훈아는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나훈아의 오랜 팬이었던 어르신 세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젊은 세대의 사람들도 좀 더 오랫동안 가황 나훈아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출처 : 위키백과, 나무위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그 외 신문 기사, 텔레비전 방송, 인터넷 뉴스 기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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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5위 – 나훈아
[[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5위 – 나훈아 ]]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시리즈, 그 다섯 번째 시간. 한국 대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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