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6위 – 남진

JOHN CENA 2023. 8. 26. 02:54

[[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6위 – 남진 ]]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시리즈, 그 여섯 번째 시간.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6위, 남진. 1960년대와 70년대 가요계를 평정했던 당대의 슈퍼스타이자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 남진에 대한 이야기가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TOP 50> 시리즈의 남진 편과 나훈아 편을 본격적으로 연재하기에 앞서서 콘텐츠의 기본적인 컨셉과 기획의도, 구성 등에 관한 부분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문서 작업의 순서는 남진 편을 먼저 작성하고 나훈아 편을 나중에 작성한 뒤, 유튜브 업로드 순서는 5위 나훈아 편을 먼저 업로드하고 6위 남진 편을 나중에 업로드할 계획입니다.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라이벌 구도가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에 걸쳐서 펼쳐졌던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인 만큼, 두 슈퍼스타는 항상 서로 함께 언급될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렇기는 한데, 언론 매체에서 이들의 라이벌 관계에 대한 역사를 다루는 방식과 인터넷 댓글창에서 양측의 팬들이 반응하는 방식에는 좀 온도차가 많이 나는 편입니다.

 

  일반적으로 공중파 TV나 케이블 TV 같은 매스컴에서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에 대해 다루는 방식을 보면 너무 도가 지나칠 정도로 아름답게만 포장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남진과 나훈아, 두 슈퍼스타만이 존재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그리고 유튜브에서 남진과 나훈아에 대해 소개하는 영상 자료들도 대체로 비슷한 분위기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댓글들은 영상 자료의 분위기와는 너무도 딴판입니다. 특히 양측의 극성팬들이 댓글창에 몰려들기 시작하면 험악한 말들이 오가면서,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쨉도 안 되는데, 라이벌로 엮지 좀 말라!”고 말하는 댓글들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진흙탕 싸움으로 흘러가면서 눈쌀이 찌푸려지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들을 보면서, 저는 이번 시리즈를 작성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원칙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저의 기획의도와 컨셉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저는 기존의 영상 자료들에서처럼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에 대한 역사를 소개하면서 굳이 아름답게만 포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댓글 반응에 일일이 휘둘리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그냥 예전에 어떤 일들이 있었고 오늘날 팬들 사이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만 최대한 사실적으로 기록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남진 편과 나훈아 편의 초반부에서는 상당 부분 멘트가 겹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의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에 대한 역사를 기록하려면 공통적으로 겹치는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가수 개인 대 개인의 라이벌 관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양대 기획사였던 지구레코드와 오아시스레코드의 헤게모니 다툼이 근본적인 배경에 깔려 있기도 하고,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의 가요계의 전반적인 흐름에 관한 설명도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1960년대와 1970년대까지의 가요계 역사를 서술하는 부분, 그리고 지구레코드와 오아시스레코드의 파워게임에 관한 부분을 설명하는 것은 남진 편과 나훈아 편에서 공통적으로 다룰 계획입니다. 실제로 이 콘텐츠를 시청하는 분들은 남진 편만 검색해서 보거나 나훈아 편만 검색해서 보는 분들이 꽤 많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남진 편에서 언급했다고 해서 나훈아 편에서 생략하고 넘어간다든가, 나훈아 편에서 언급했다고 해서 남진 편에서 생략하고 넘어간다든가 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반면에 1980년대 이후부터 2000년대를 넘어서 2020년대에 접어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굳이 두 사람의 라이벌 구도를 더 이상 언급하지는 않을 계획입니다. 이미 1980년대 이후부터 남진과 나훈아, 두 분이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계속해서 라이벌로 엮으면서 남진 편에서 나훈아에 대한 언급을 한다든가, 나훈아 편에서 남진에 대한 언급을 한다든가 그럴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국 대중가요 레전드 TOP 50> 시리즈의 기본적인 컨셉은 KBS의 <불후의 명곡>이나 SBS의 <아카이브K>처럼 역사를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데에 중점적인 목표를 둘 계획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제가 정식으로 연예계나 음악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까 공식적인 언론 매체의 프로그램과 완전히 똑같이 만들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접하게 되는 현실 공간에서는 매스컴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어둠의 세계’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그러한 ‘어둠의 세계’의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되는 영역입니다. 매스컴에서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는 가수나 연예인들에 대한 역사를 서술할 때 어떻게든 아름답게만 포장하려 하는 경향이 있지만, 인터넷 공간의 댓글창에서는 팬들 사이의 진흙탕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인터넷 댓글창에서의 ‘진흙탕 싸움’의 실체를 굳이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날 인터넷 댓글창에서 남진, 나훈아, 조용필 세 분의 팬들 사이에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최대한 사실적으로 기록할 계획입니다.

 

  블로그 문서를 작성하고 유튜브 영상을 업로드하는 데 있어서 참고한 자료들의 출처에 대해서 먼저 간략하게 언급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가장 기본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자료들에는 위키백과, 나무위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우리가요 아카이브K 홈페이지 같은 곳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에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여러 신문사의 기사를 검색하면서 기자나 칼럼니스트들이 작성한 기사나 칼럼 등을 더 폭넓게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음악평론가 최규성 씨가 2020년 10월 17일에 월간중앙에 기고한 칼럼인 <문화열풍/특별기고 - 테스형으로 돌아온 나훈아 파워의 비밀>, 음악평론가 김형찬 씨가 2016년 7월 4일부터 7월 18일까지 국제신문에 기고한 3부작 칼럼 시리즈인 <김형찬의 대중문화 이야기 - 남진, 나훈아. 숙명의 라이벌>, 매일신문의 2018년 3월 2일 기사인 <문화인 & 스토리 - 영원한 젊은 오빠 남진>, 서울신문의 2015년 3월 25일 기사인 <썬데이서울로 보는 그때 그 시절>, 1982년 4월 20일부터 5월 1일까지 동아일보에서 11부작으로 연재한 <명대결 - 나훈아와 남진> 시리즈를 통해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오늘날의 10대부터 40대까지의 연령대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남진과 나훈아가 활동하던 시대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눈높이에서 과거 역사를 대입해서 해석하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때 요즘 10대부터 40대까지의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인용되는 라이벌 구도에는 HOT vs 젝스키스, 동방신기 vs 빅뱅, 원더걸스 vs 소녀시대, 엑소 vs 방탄소년단, 트와이스 vs 블랙핑크의 라이벌 구도에 대입해서 설명해보려고 하는 시도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인용되는 HOT와 젝스키스의 라이벌 구도를 예로 들어서 설명하는 것이 오늘날의 10대부터 40대까지의 사람들에게 가장 쉽게 와닿을 수 있는 비유법일 것입니다. 저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에게 가장 유명한 HOT와 젝스키스의 라이벌 구도에서 단순히 ‘문희준 vs 은지원’, ‘강타 vs 강성훈’, ‘장우혁 vs 이재진’ 같은 개인 간의 라이벌 구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본질적인 부분이 있죠. 바로 SM 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 사장과 DSP 엔터테인먼트의 이호연 사장의 헤게모니 다툼이 그 근본에 깔려 있는 배경입니다.

 

  사실 SM의 이수만 사장은 DSP의 이호연 사장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많이 신경을 쓰는 편은 아니었고, DSP의 이호연 사장이 SM의 이수만 사장에게 일방적으로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끊임없이 도전장을 던지는 구도였습니다. DSP의 이호연 사장이 SM의 간판스타 HOT를 타깃으로 삼아서 탄생시킨 그룹이 젝스키스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죠. 그래서 젝스키스는 처음 데뷔를 준비하던 당시부터 ‘타도 HOT’에 대한 강박관념을 주입받아 왔습니다.

 

  그러다가 젝스키스가 데뷔하고 나서 기세가 심상치 않다 보니까 SM 측에서도 젝스키스에 대해서 열심히 모니터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HOT도 젝스키스를 신경쓸 수밖에 없도록 압박을 받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DSP가 SM을 향해서 일방적으로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젝스키스에게 HOT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주입시켰지만, 나중에 가서는 SM에서도 DSP를 의식하기 시작하고, HOT에게 젝스키스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주입시키게 되죠.

 

  여기에서 SM 엔터테인먼트 이수만 사장의 자리에 지구레코드 임정수 사장, DSP 엔터테인먼트 이호연 사장의 자리에 오아시스레코드 손진석 사장, HOT의 자리에 남진, 젝스키스의 자리에 나훈아를 대입하면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한번 상상해 보세요. 만약 젝스키스가 어느 날 갑자기 SM으로 소속사를 옮겨서 유영진 작곡가한테 곡을 받아서 신곡을 발표했다면 어떠한 파장이 일어났을까요? 상상이 가시나요? 이게 바로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에 일어났던 일들입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걸쳐서 전개됐던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의 그 본질적인 배경은 지구레코드 임정수 사장과 오아시스레코드 손진석 사장의 대립구도입니다. 당대의 양대 기획사의 헤게모니 다툼과 신경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상황에서, 두 기획사 사장의 대리전을 수행하기 위해 지구레코드 임정수 사장의 아바타로 선택된 인물이 남진, 오아시스레코드 손진석 사장의 아바타로 선택된 인물이 나훈아였던 것입니다.

 

  지구레코드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의 대중가요계를 지배했던 최대의 기획사였습니다. 당시의 지구레코드의 파워는 오늘날의 SM이나 YG보다도 훨씬 더 대단한 위세를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지구레코드는 1960년대에 미도파레코드라는 이름으로 출범했다가 나중에 회사명을 바꾸게 되는데, 이미자의 등장을 계기로 국내 최대의 기획사로 자리매김한 후 1980년대에는 조용필을 소속 가수로 보유하며 그 영향력을 떨쳤습니다.

 

  지구레코드의 전속 작곡가가 그 유명한 박춘석 선생이었고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를 비롯해서 당대의 유명 가수들이 거의 대부분 지구레코드를 한번쯤은 거쳐가면서 박춘석 작곡가에게 곡을 받아서 수많은 히트곡들을 배출했습니다. 이렇게 박춘석 선생의 곡을 받아서 히트한 가수들을 일컬어서 ‘박춘석 사단’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1960년대의 이미자와 1980년대의 조용필은 꾸준하게 지구레코드 전속 가수로 활동했고, 패티김은 신세기레코드, 오아시스레코드, 지구레코드를 모두 거쳐간 경력이 있으며 남진과 나훈아는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데뷔해서 지구레코드로 이적했습니다.

 

  지구레코드와 경쟁 관계였던 오아시스레코드는 지구레코드보다 더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오아시스레코드에서 유망한 신인 가수를 스타로 키워내면 지구레코드에서 냉큼 낚아채 가곤 했습니다. 오아시스레코드는 지구레코드보다 자금력에서 한참 열세에 있었기 때문에 눈뜨고 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오아시스레코드의 손진석 사장은 지구레코드의 임정수 사장에게 뿌리깊은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있었고, 지구레코드의 임정수 사장은 오아시스레코드를 그렇게까지 적수로 의식하지는 않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남진이 가수로 처음 데뷔했을 때는 오아시스레코드 소속 가수로 데뷔했지만, 얼마 후에 지구레코드로 이적해서 슈퍼스타로 발돋움했습니다. 남진이 지구레코드로 이적한 이후에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데뷔한 신인 가수가 나훈아였습니다. 오아시스레코드의 손진석 사장이 지구레코드의 남진을 타깃으로 삼아서 키워낸 가수가 바로 나훈아였습니다. 따라서 나훈아는 처음 가수로 데뷔하던 그 순간부터 오아시스레코드의 손진석 사장을 통해서 남진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끊임없이 주입받아야 했습니다.

 

  나훈아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보니까 비로소 지구레코드의 임정수 사장도 오아시스레코드의 나훈아를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 지구레코드에서는 월남전 파병을 나가 있던 남진을 잠시 귀국시켜서 <사랑이 스쳐간 상처>라는 신곡을 취입하게 했습니다. 남진의 <사랑이 스쳐간 상처>는 나훈아의 <두 줄기 눈물>을 제치고 가요차트 1위에 올랐습니다. 이때가 바로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대결이 최초로 개시된 시점이었습니다.

 

  1971년에 남진이 월남(베트남)에서 귀국한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전이 격화되면서 1971년부터 1973년까지 3년간의 전쟁과도 같은 대결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남진도 지구레코드의 임정수 사장을 통해서 나훈아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끊임없이 주입받아야 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 남진의 출세작이었던 <가슴아프게>는 박춘석 작곡가에게 받은 곡이었습니다. 나훈아의 출세작이었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은 남국인 작곡가가 작사에 참여했던 곡이었습니다. 당시 남국인 작곡가는 지구레코드에 소속된 상태에서 오아시스레코드 소속 가수인 나훈아의 곡에 가사를 써주는 상황이 발생했는데, 이 때문에 나훈아의 음반이 발표될 당시에 작곡가와 작사가의 이름은 본명이 아닌 예명이 표기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지구레코드와 오아시스레코드의 사활을 건 전쟁에서 양대 기획사 사장의 아바타로 내세워진 인물이 남진과 나훈아였습니다. 그런데 이 싸움이 흥행이 되다 보니까 매스컴에서 대놓고 싸움을 부추기기 시작했습니다. 남진과 나훈아는 처음에는 남의 싸움에 등떠밀려서 얼떨결에 선봉장이 되었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역할에 몰입하게 되면서 진심으로 라이벌 의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1972년에 나훈아가 먼저 회심의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남진의 소속사인 지구레코드로 이적하면서 적진으로 뛰어든 것입니다. 당시 지구레코드에서 남진에게 해주던 대우에 비해서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나훈아에게 해주는 대우는 다소 미흡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나훈아와 오아시스레코드 손진석 사장이 갈등을 빚던 와중에 지구레코드에서 나훈아를 잽싸게 스카웃해 간 것이었습니다. 소속사의 규모와 자금력에서도 지구레코드가 오아시스레코드를 압도했고, 지구레코드에는 당대 최고의 작곡가인 박춘석 선생이 있었습니다. 나훈아는 남진과의 라이벌 대결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지구레코드로 이적해서 박춘석 작곡가에게 곡을 받아서 <물레방아 도는데>를 발표했습니다.

 

  이번에는 남진이 강력하게 반발하기 시작했습니다. 1972년 3월 26일자 썬데이서울 기사에 따르면 당시 남진은 지구레코드와의 재계약 포기를 선언했고, 이 때문에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남진의 영입에 나설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남진의 소속사 이적이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남진은 소속사와 갈등을 빚는 과정에서 새로운 작곡가를 파트너로 물색 중이었고, 남국인 작곡가를 만나서 그의 대표곡인 <님과 함께>를 취입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지구레코드 임정수 사장의 중재가 있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 남진의 <가슴아프게>는 박춘석 작곡가에게 받은 곡이었고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은 남국인 작곡가가 작사에 참여했던 곡이었습니다. 1972년에는 이러한 파트너쉽 관계가 완전히 거꾸로 뒤바뀌면서, 박춘석 작곡가가 나훈아에게 <물레방아 도는데>라는 곡을 주었고, 남국인 작곡가가 남진에게 <님과 함께>라는 곡을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는 더 이상 지구레코드와 오아시스레코드의 대리전이 아닌, 가수 본인이 진심으로 대결에 임하게 되는 전면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가요계의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라이벌 구도로 꼽히는 관계가 1940년대의 남인수 vs 백년설의 격돌, 그리고 1970년대의 남진 vs 나훈아의 격돌이었습니다. 30년 간격을 두고 펼쳐진 두 라이벌 구도에서는 마치 평행이론처럼 닮은꼴로 역사가 반복되었습니다. 단순히 가수 개인의 라이벌 구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양대 기획사의 헤게모니 다툼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그 대리전을 수행하기 위한 선봉장으로 소속 가수를 내세웠던 것입니다.

 

  광복 이전에는 <오케레코드>라는 당대 최고의 기획사가 있었고 광복 이후에는 <지구레코드>라는 당대 최고의 기획사가 있었습니다. <오케레코드>에게는 <태평레코드>라는 라이벌 기획사가 존재했고, <지구레코드>에게는 <오아시스레코드>라는 라이벌 기획사가 존재했습니다. <오케레코드>의 전속 작곡가였던 박시춘 선생은 광복 이전의 최고의 작곡가였던 동시에 대한민국의 대중가요 역사상 최고의 작곡가였습니다. <지구레코드>의 전속 작곡가였던 박춘석 선생은 광복 이후의 대한민국의 최고의 작곡가였습니다.

 

  1940년대에는 <오케레코드 - 작곡가 박시춘 - 가수 남인수>의 라인업과 <태평레코드 - 작곡가 이재호 - 가수 백년설>의 라인업이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백년설이 <오케레코드>로 이적하면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고, 간판스타 백년설을 빼앗긴 <태평레코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로부터 30년이 지난 1970년대에는 나훈아가 <지구레코드>로 이적하면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고, 간판스타 나훈아를 빼앗긴 <오아시스레코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마치 평행이론처럼 흡사한 구도로 역사가 반복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10대부터 40대까지의 사람들에게는 <SM 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의 이름을 들으면 ‘거대 기획사의 횡포’를 떠올리게 되는 악명높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악명높은 SM조차도 DSP에서 젝스키스를 빼간다거나, YG에서 빅뱅을 빼간다거나, JYP에서 원더걸스를 빼간다거나, 빅히트에서 방탄소년단을 빼간다거나 하는 만행을 저지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광복 이전 최대의 기획사였던 오케레코드에서는 경쟁사인 태평레코드의 간판스타 백년설을 빼가는 만행을 저질렀고, 광복 이후 최대의 기획사였던 지구레코드에서는 경쟁사인 오아시스레코드의 간판스타 나훈아를 빼가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 외에도 과거의 사례들을 더 구체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오케레코드와 지구레코드는 경쟁사의 간판스타들을 닥치는대로 빼가는 만행을 저질러왔습니다. 대한민국의 대중가요 역사를 풍미한 희대의 라이벌 구도로 회자되는 <남인수 vs 백년설>, <남진 vs 나훈아>의 두 라이벌 관계의 이면에는 이와 같은 거대 기획사의 횡포와 알력다툼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1960년대에서 70년대에 걸친 전체적인 가요계의 동향에 대해서도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가요계 최고의 스타는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였습니다. 일반적으로 10년 단위로 시대 구분을 할 때 이미자와 패티김을 1960년대의 인물로, 남진과 나훈아를 1970년대의 인물로 분류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서 이미자가 가요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이미자와 함께 패티김이 라이벌이자 양대산맥으로 꼽히기는 했지만, 패티김은 주로 해외활동에 주력하다가 가끔씩 귀국하면 매스컴에서 대대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고, 대형 공연 무대를 통해서 이미자와 경쟁을 벌이는 구도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미자와 패티김은 주로 정면대결을 펼치기보다는 서로 활동 영역을 달리하고 있었습니다. 국내 무대에서의 가요 차트나 연말 시상식은 이미자의 독무대였고, 패티김은 국내 무대에서의 연말 가요 시상식에서는 자주 만나기 힘든 인물이었습니다.

 

  이미자가 국내 무대를 휩쓸고 있던 시절에 남자 가수 중에서 가요계의 왕좌에 도전했던 대표적인 인물들은 최희준, 배호가 있었습니다. 최희준은 <하숙생>의 히트에 힘입어서 1965년 TBC 방송가요대상과 1966년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가요대상 수상자로 등극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는 배호가 <안개 낀 장충단공원>, <돌아가는 삼각지> 등의 히트곡을 배출하며 최고의 슈퍼스타로 떠올랐습니다. 배호는 당대의 어르신들에게 이미자 못지않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에 걸쳐서 새로운 세대의 슈퍼스타로 남진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최고의 남자가수 자리는 배호에서 남진으로 세대교체가 진행중이었고, 가요계의 제왕 자리는 이미자의 시대에서 남진의 시대로 세대교체가 진행중이었습니다. 남진은 1967년에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처음으로 10대가수에 선정됐습니다.

 

  남진은 1968년에 해병대에 입대하면서 1970년까지 약 3년간의 공백기를 가졌습니다. 군생활 기간 동안 연예활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1969년부터는 월남전 파병을 나가면서 국내 무대에서 자리를 비우게 됐습니다. 남진은 베트남으로 떠나고 없는 상태에서도 여전히 건재하게 인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1969년 TBC 방송가요대상에서는 국내 무대에 부재중인 상태였던 남진이 남자가수 대상을 수상하는 저력을 과시했습니다.

 

  나훈아는 1969년에 <사랑은 눈물의 씨앗>의 히트에 힘입어서 스타덤에 오르기 시작했고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는 처음으로 10대가수에 선정됐습니다. 나훈아는 배호와 닮은 창법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남진의 라이벌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나훈아는 배호와는 닮은꼴 캐릭터로 비교대상이 되었고, 남진과는 정반대의 대조적인 캐릭터로 비교대상이 되었습니다.

 

  1971년에 남진이 월남전 파병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남진과 나훈아의 본격적인 대결구도인 ‘3년 전쟁’이 막을 올렸습니다. 당시 MBC 방송국에서는 남진의 귀국을 환영하는 특별무대를 마련해주었고, 남진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GI 블루스>를 불렀습니다. MBC에서 예전에 자료화면으로 종종 접할 수 있었던 흑백 영상에서는 남진이 엘비스 프레슬리의 무대를 멋지게 재연해내고, 여성 댄서들이 “하나둘셋넷! 하나둘셋넷!”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 희대의 명장면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1971년 연말 시상식에서 남진은 TBC 방송가요 대상의 <남자가수 대상>과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최고 인기가수>를 휩쓸며 나훈아와의 라이벌 대결에서 완승을 거뒀습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슈퍼스타 남진이 가요대상을 수상한 것이 어찌보면 당연하게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나훈아의 팬들은 당시의 일에 대해서 뼈에 사무치는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나훈아 팬들의 주장도 분명 일리가 있는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1971년의 가요대상은 1971년 한 해 동안 최고의 활동 실적을 올린 가수에게 주는 상입니다. 1971년에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가장 히트곡을 많이 배출한 가수는 나훈아였습니다. 그런데 남진이 귀국한 직후부터 방송국에서 남진에게 특별대우를 해주면서 대상까지 수여한 것은 너무 편파적이라는 주장이 오늘날까지도 종종 거론되곤 합니다.

 

  물론 당대의 가요계에서 가수의 활동 여부와 관계없이 순전한 인기에 따른 서열은 이미자가 1순위, 남진이 2순위였습니다. 당시 남진이 월남전 파병을 마치고 금의환향하던 사회적인 분위기를 감안하면 남진이 당대 최고의 스타였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1971년 가요대상의 시상기준에 가장 부합하는 가수가 나훈아였음에도 불구하고 남진에게 대상을 빼앗겼다는 점이 나훈아 팬들이 두고두고 억울하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남진 팬들의 입장에서도 나름의 억울함이 있기는 합니다. 남진이 해외여행을 떠난 것도 아니고, 해외에서 연예활동을 한 것도 아니고 국가의 부름을 받고 월남전에 파병됐다가 금의환향을 했던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에 따르면 충분히 특별대우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이 남진 팬들의 기본적인 정서입니다. 월남전 참전용사로서 그에 합당한 예우를 받을 자격이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특혜라느니, 편파적이라느니 하는 소리를 듣는다는 점에서 남진 팬들도 역시 억울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1972년에는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대결이 정점을 찍었던 해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방송국의 분위기도 TBC는 나훈아와 밀착하고 MBC는 남진과 밀착하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나훈아는 1972년에 <물레방아 도는데>와 <고향역>이라는 양대 히트곡을 탄생시켰고, 남진은 그 유명한 <님과 함께>라는 초메가 히트곡을 탄생시켰습니다. 특히 나훈아가 지구레코드로 전격 이적하고 박춘석 작곡가와 손을 잡으면서 일으킨 나비효과로 인해서 남진과 남국인 작곡가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그 유명한 <님과 함께>의 탄생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1972년에 TBC 방송가요대상에서는 나훈아가 <남자가수 대상>을 수상했고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는 남진이 <최고 인기가수>를 수상했습니다. 가요대상 트로피를 한 개씩 나눠 가졌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무승부였지만, 당대의 가요계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최고 인기가수>가 진정한 가수왕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남진이 판정승을 거둔 것으로 인식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리고 1973년에는 남진이 <그대여 변치마오>의 인기에 힘입어서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최고 인기가수>와 TBC 방송가요 대상의 <남자가수 대상>을 모두 휩쓸면서 ‘3년 전쟁’의 승자로 등극했습니다. ‘3년 전쟁’의 승자였던 남진은 1960~70년대의 가요계 역사에서 이미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후 나훈아는 1973년에 군대에 입대했고, 남진은 1975년까지는 건재하게 활동하다가 1976년 이후부터는 정상에서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 중후반에 남진과 나훈아는 모두 사실상의 잠정 은퇴 상태가 되었고, 남진과 나훈아가 모두 가요계를 떠나 있던 그 시절에도 이미자는 여전히 전통가요의 여왕으로서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미자는 1966년부터 1979년까지 14년 연속으로 MBC 10대가수 가요제에 단골손님으로 출연해서 무려 열두 차례나 10대가수에 선정됐고, 두 차례의 특별가수상을 수상했습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조용필이 새로운 시대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로 등극했습니다.

 

  1980년대 초반에는 남진과 나훈아가 다시 가요계로 복귀하면서 제2의 가수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남진과 나훈아의 대결 구도에서 처음으로 역전이 이루어진 시점이 1982년이었습니다. 당시는 조용필의 시대였지만, 여전히 조용필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도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었고, 어르신들 사이에서 전통가요에 대한 수요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나훈아는 이미자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전통가요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고, 1980년대부터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가요계를 대표하는 전설들의 서열은 조용필, 이미자, 나훈아의 순서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인터넷 공간에서는 남진, 나훈아, 조용필 세 분의 팬들이 열성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댓글창의 분위기를 유심히 관찰해보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남진의 팬들과 조용필의 팬들이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구도는 거의 보기 힘든 반면에 남진 vs 나훈아, 나훈아 vs 조용필의 대립구도는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일부 극성팬들 사이에 험한 말이 오가는 모습도 빈번하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남진의 전성기 시절에는 조용필이 아직 전성기를 맞이하지 못했던 시절이었고 조용필의 전성기 시절에는 남진의 전성기가 지났던 시절이었습니다. 남진이 가요계의 황제로 집권했던 기간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약 5년 안팎의 기간이었고, 조용필이 가요계의 황제로 집권했던 기간은 1980년대 이후부터 약 40년 이상의 세월동안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오며 사실상의 ‘종신집권 황제’나 다름없는 위상을 확보했습니다. 남진과 조용필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할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도 특별히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반면에 나훈아는 남진의 전성시대에도 남진의 아성에 강력하게 도전하는 2인자 같은 느낌의 ‘공동 황제’ 같은 그런 위상을 누리고 있었고, 조용필의 전성시대에도 나훈아는 조용필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별도의 영역을 지배하는 ‘전통가요의 황제’로서의 위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나훈아는 남진, 조용필 양쪽과 모두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1인자의 아성에 도전하는 매우 강력한 2인자로서의 지위를 수십년째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나훈아의 팬들은 남진, 조용필 양쪽의 팬들과 모두 대립구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사실 남진과 나훈아 양쪽의 팬들은 결코 서로를 선의의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짓밟아서 깔아뭉개야 할 상대로 여기고 진심으로 험한 말을 주고받으면서 싸워왔습니다. 하지만 양측의 팬들이 진심으로 상대방을 깔아뭉개기 위해 그렇게 싸워댔던 것이 매스컴에 의해 증폭되면서 결과적으로는 남진과 나훈아, 두 사람이 모두 끊임없이 존재감이 부각되어 왔습니다. 당사자들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적대적 공생관계가 되었던 것입니다.

 

  실제 당사자인 남진과 나훈아, 두 가수의 사이도 젊은 시절에는 불편하고 껄끄러운 관계였습니다. 주변에서 대놓고 싸움을 붙여대고 매스컴에서 그렇게 떠들어대니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던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서 인생의 황혼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고 보니까 두 사람 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그 시절에 참 재미있었다”며 웃어넘길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된 것입니다.

 

  사실 1970년대 당시에는 기자들이 특종 한번 잡아보겠다고 남진과 나훈아 두 사람 사이에서 열심히 싸움을 붙이고 이간질도 시켰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유명한 연예부 기자였던 이상벽 씨도 그렇게 싸움을 붙였던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서 1990년대 초반에는 나훈아와 이상벽이 함께 방송에 출연해서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그 시절에 대해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생겼습니다.

 

  나훈아는 바로 옆자리에 앉은 이상벽 씨를 가리키면서 이상벽 씨가 중간에서 싸움도 붙였다가 화해도 시켰다가 했다는 언급을 하고,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참 재미있는 시절이었고, 황금기였다는 언급을 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이상벽 씨가 본인이 열심히 싸움을 붙이고 다녔던 시절에 대해서 신나게 썰을 풀어놓기도 했습니다.

 

  2010년대 이후에 방송에 자주 출연하기 시작한 남진도 나훈아와의 라이벌 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수십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까지도 이렇게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이 참 고마운 일이다”라는 답변을 남기면서 그 시절을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남진과 나훈아, 두 당사자들은 이제 과거의 일에 대해서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생겼지만, 아직도 인터넷 댓글창에서는 일부 극성팬들이 1970년대와 80년대의 기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험한 말을 주고받으면서 싸우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습니다.

 

  남진과 나훈아의 양쪽 팬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날 때는 양측 모두 서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부분의 수상 기록만 내세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로 남진의 팬들은 1970년대 초반에 남진이 MBC에서 3년 연속 가수왕을 수상했다는 사실을 내세우고, 나훈아의 팬들은 2000년대 초반에 나훈아가 MBC 명예의 전당 가수 부문에 헌액됐다는 사실을 내세우고 있죠.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최고 인기가수>의 역대 수상 기록에서는 조용필이 통산 6회 수상으로 1위, 이미자와 남진이 통산 3회 수상으로 공동 2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 3년동안 거행됐던 <MBC 명예의 전당> 행사에서 가수 부문 헌액자로는 2000년 제1회 명예의 전당에서 조용필, 2001년 제2회 명예의 전당에서 나훈아, 2002년 제3회 명예의 전당에서 이미자가 헌액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자와 조용필은 전성기 당시에도 가수왕을 독차지하며 가요계의 제왕으로 군림했고, 전성기가 지난 이후에도 여전히 가요계의 독보적인 존재로서 건재함을 과시하며 명예의 전당에 오른 것입니다. 그런데 남진과 나훈아 양측의 극성팬들끼리만 서로 ‘가수왕’ 수상 기록과 ‘명예의 전당’ 헌액 기록 중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부분만 부각시키면서 인터넷 댓글창에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가요계에서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의 기간 동안에는 이미자가 독보적인 여왕이었고 1980년대 이후부터는 조용필이 영원불멸의 가수의 왕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전통가요를 대표하는 인물로 이미자와 남진이 투톱 체제를 형성했고, 1980년대 이후부터는 전통가요를 대표하는 인물로 이미자와 나훈아가 투톱 체제를 형성해 왔습니다.

 

  남진과 나훈아는 이미자, 조용필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전성기가 짧은 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스컴에서 남진과 나훈아의 대결구도를 끊임없이 부각시켜준 덕분에, 노이즈마케팅 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매스컴에서 싸움을 붙여준 덕분에 남진과 나훈아 두 사람이 모두 수혜자가 되면서 이미자, 조용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전설로 존재감이 부각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남진 편과 나훈아 편의 멘트가 겹치는 부분입니다. 대한민국의 대중가요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라이벌 구도와 그 시대적인 배경을 설명하려다 보니까, 불가피하게 중복되는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략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남진과 나훈아, 두 사람의 각자의 가수 인생에 대한 내용을 따로따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의 내용은 후속편에서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남진의 가수 인생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남진의 가수 인생 전반을 돌아보고 기록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크게 참고가 된 자료는 2021년 1월에 MBN에서 방영된 <인생앨범 예스터데이 - 남진 편>에서의 방송 자료가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남진이 몇 년도에 무슨 노래를 발표했는지에 대해서는 각 신문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들이나 칼럼니스트들도 헷갈려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단 기본적으로는 위키백과에 등재되어 있는 목록을 참고하되, <인생앨범 예스터데이> 방송을 통해서 본인이 직접 증언한 내용을 토대로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남진은 1964년에 가수로 데뷔하면서 데뷔곡인 <서울 푸레이보이>를 발표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남진은 처음 데뷔하자마자 승승장구하면서 꽃길만 걸어왔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 데뷔곡의 성적은 처참했다고 합니다. 남진의 데뷔곡은 아예 제대로 방송에 나올 기회조차 얻지 못했고, 이어서 발표한 <연애 0번지>라는 노래는 방송을 몇 번 탄 후에 느닷없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금지곡 처분을 받는 날벼락을 맞았다고 합니다.

 

  2021년 1월에 방영된 <인생앨범 예스터데이 - 남진 편>에서 남진은 자신의 데뷔곡인 <서울 푸레이보이>와 금지곡 처분을 받았던 <연애 0번지>를 생애 처음으로 방송 무대에서 직접 불렀습니다. 전설의 슈퍼스타 남진의 데뷔곡과 두 번째 노래가 무려 56년 만에 봉인이 풀리고 방송에서 공개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1966년에 발표한 <울려고 내가 왔나>가 첫 히트곡이 되면서 남진은 1966년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신인가수상을 수상했고, 1967년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는 생애 처음으로 10대가수 상을 수상했습니다. 1967년에 남진은 작곡가 박춘석 선생과 처음으로 만나게 되면서 <가슴아프게>와 <마음이 고와야지>를 발표했습니다. 두 노래 모두 박춘석 선생이 작곡해준 곡이며, 남진의 생애 첫 가요대상 수상곡이기도 합니다.

 

  남진은 1967년에 <가슴아프게>를 발표한 후 1968년부터 1970년까지 3년간 군입대로 인한 공백기를 가졌습니다. 남진은 해병대에 입대한 후에 월남전에 파병되었습니다. 남진이 이미 월남(베트남)으로 떠나고 국내에 부재중인 상태에서 남진의 노래인 <가슴아프게>는 서서히 인기가 확산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1969년 <TBC 방송가요 대상>에서 남진은 <가슴아프게>의 인기에 힘입어서 남자가수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월남전 파병을 나가 있는 상태에서 생애 첫 가요대상을 수상한 것이었습니다.

 

  남진의 <마음이 고와야지>는 1971년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최고 인기가수 상을 수상할 당시의 대상곡이었고, 위키백과에도 1971년에 발표된 노래로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네이버 지식백과의 <가요앨범사> 코너에는 1967년에 발표된 노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2021년 1월에 MBN에서 방영된 <인생앨범 예스터데이>에서도 <마음이 고와야지>는 1967년에 발표한 노래라고 나왔습니다. 따라서 위키백과의 기록이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남진이 월남전 파병 이전인 1967년에 발표했던 <가슴아프게>와 <마음이 고와야지>는 모두 월남전 파병 이후에 인기를 얻게 되면서 각각 TBC와 MBC에서 남진에게 생애 첫 가요대상을 안겨준 노래가 되었습니다. <가슴아프게>는 남진이 월남(베트남)에 파병을 나가 있었던 1969년에 <TBC 방송가요 대상>의 남자가수 대상 수상곡이 되었고, <마음이 고와야지>는 남진이 월남(베트남)에서 귀국한 1971년에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최고 인기가수 수상곡이 되었습니다.

 

[부연설명]

1960년대 중반에서 후반 무렵에 남진이 몇 년도에 무슨 노래를 발표했고, 무슨 노래가 히트했는지에 대한 기록을 찾는 데 있어서는, 인터넷 검색만으로는 정확한 고증이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연예계 종사자나 관련자가 아닌 일반인이 정확한 정보를 얻기에는 사실 어려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동안 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 전반적인 흐름을 살펴본 바에 따르면 남진이 1969년에 월남전 파병으로 인한 공백기를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기가 식지 않고 <TBC 방송가요대상>의 남자가수 대상을 수상했다는 부분까지는 확실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상 수상곡이 <가슴아프게>인지, <미워도 다시한번>인지, 아니면 다른 노래였는지에 대한 부분은 혹시 착오가 있었더라도 너그러운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1971년의 경우에도 남진의 MBC 가수왕 수상곡이 나무위키 검색에 의하면 <마음이 고와야지>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지만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당시의 신문기사를 검색하면 1971년에 남진이 귀국 당시에 발매했던 음반의 타이틀곡 제목은 <마음이 약해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1969년에서 1971년 사이의 가요계 역사를 정리할 때 1969년과 1971년에 남진이 가요대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은 확실한 기록으로 남아 있고, 당대의 인기 가수 겸 영화배우로 활약했다는 사실도 과거 신문기사 검색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가요대상을 수상할 당시의 노래 제목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인터넷 검색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확실하지가 못해서, 정확한 고증을 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좀 있는 편입니다.

 

  남진은 1960년대 후반에 유명한 영화의 주제곡인 <미워도 다시한번>이라는 히트곡도 배출했습니다. 이 노래도 위키백과에서는 1977년에 발표한 노래로 나와 있지만, 네이버 지식백과의 <가요앨범사> 코너에서는 1968년에 발표한 노래로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속편인 <속 미워도 다시한번>의 주제곡은 1969년에 발표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진은 가수로 처음 데뷔할 당시에 최희준과 닮은꼴 창법으로 주목받았습니다. 2021년 1월에 방영된 MBN의 <인생앨범 예스터데이> 방송 내용 중에도 MC를 맡고 있던 주현미가 남진에게 최희준 선배님의 느낌이 난다는 언급을 하자 남진이 이를 곧바로 인정하면서 데뷔 초창기에 있었던 일들을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남진과 나훈아의 데뷔 초창기 시절에 당대 최고의 남자 가수는 최희준과 배호였습니다. 데뷔 초기에 남진은 최희준의 창법과 닮은꼴로 주목받았고, 나훈아는 배호의 창법과 닮은꼴로 주목받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기사나 칼럼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레퍼토리들이 있습니다. 남진은 도시적이고 세련된 서구풍의 팝스타일의 노래들을 주로 불렀고, 나훈아는 농촌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정통 트로트를 주로 불렀다는 이야기들입니다. 최희준의 노래 스타일이 서구적인 팝스타일이었고, 배호의 노래 스타일이 정통 트로트였습니다. 남진과 나훈아는 각각 최희준과 배호의 캐릭터를 계승한 후계자였던 것입니다.

 

  1971년에 남진이 월남전 파병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마침내 본격적인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가 개막되었습니다. 일반적인 경우에 인기 절정의 가수가 군입대를 할 경우 그 인기를 다시 회복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남진의 경우에는 월남전 참전용사의 자격으로 금의환향하게 되면서, 오히려 군입대 이전보다도 더욱 뜨거운 인기를 누렸습니다.

 

  1971년에 남진은 귀국 직후에 MBC에서 그 유명한 엘비스 프레슬리의 <GI 블루스> 무대를 선보였습니다. 이 공연 장면은 MBC의 역대 자료화면을 통해서 두고두고 명장면으로 회자되었습니다. 1971년 9월에는 시민회관에서 귀국 리사이틀 공연을 열어서 그 해 최다 관객동원 기록까지 세웠습니다. 남진은 월남전 파병 이전에 발표했던 노래인 <마음이 고와야지>의 히트에 힘입어서 MBC와 TBC 양대 방송국의 연말 가요대상을 휩쓸었습니다.

 

  1972년에는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가 정점을 찍었던 해였습니다. 방송 무대에서뿐만 아니라 장외에서의 리사이틀 관객동원 대결에도 열을 올렸습니다. 양측의 경쟁은 과열 양상으로 흘러갔고, 매스컴에서도 대놓고 싸움을 부추기면서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시켰습니다. 한편 남진은 가수활동 이외에도 영화배우로서도 맹활약하면서 만능 엔터테이너로 주가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나훈아도 남진의 뒤를 따라서 영화배우 활동에 뛰어들면서 치열한 신경전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1972년에 남진의 히트곡은 <님과 함께>였고 나훈아의 히트곡은 <물레방아 도는데>, <고향역>이었습니다. 히트곡의 수에서는 나훈아가 우세했지만 남진에게는 <님과 함께>라는 초메가 히트곡의 존재가 있었습니다. 가수에게는 그 가수를 상징하는 대표곡의 존재가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같은 대표곡은 영원히 역사에 남기 마련인데, 남진의 <님과 함께>가 바로 그러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남진의 대표곡이었습니다.

 

  1972년에 <TBC 방송가요 대상>에서는 나훈아가 남자가수 대상을 수상했고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는 남진이 최고 인기가수를 수상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대상 트로피를 한 개씩 나눠 가지면서 무승부를 차지한 것처럼 보였지만, 당대 최고 권위의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가수왕’ 타이틀을 차지한 남진이 실질적인 승자였습니다.

 

  당시 나훈아는 대세가 기울자 시상식에 불참하고 월남 위문공연을 나갔다가 MBC에서 괘씸죄에 걸려서 방송금지 처분을 받았다가 나중에 징계가 해제되는 등의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후 1973년에 나훈아가 은퇴 선언을 했다가 번복하는 등의 일들이 있었고, 그러다가 나훈아가 군대에 입대하면서 남진과 나훈아의 ‘3년 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1973년에 남진은 <그대여 변치마오>라는 히트곡을 배출하며 MBC와 TBC 양대 방송국의 대상을 휩쓸었습니다. 이미 나훈아가 군입대로 라이벌전 레이스에서 이탈한 상태였고, 남진의 ‘가수왕’ 대관식은 사실상 무혈입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남진은 <TBC 방송가요 대상>에서는 1969년과 1971년, 1973년 세 차례 ‘남자가수 대상’을 수상했고,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는 1971년부터 1973년까지 3년 연속으로 ‘최고 인기가수’(가수왕)을 수상하며 ‘3년 전쟁’의 완벽한 승자로 등극했습니다.

 

  이후 남진은 1974년과 1975년까지는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10대가수’ 상을 수상하면서 건재함을 과시하다가 1976년부터는 정상의 자리에서 물러나기 시작했습니다.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대상인 ‘최고 인기가수’의 역대 수상자는 1966년 최희준, 1967년과 1968년 이미자, 1969년 펄 씨스터즈, 1970년 이미자, 1971년부터 1973년까지 남진, 1974년 하춘화, 1975년 송창식, 1976년 송대관, 1977년 혜은이, 1978년 최헌, 1979년 혜은이, 1980년 조용필로 이어졌습니다.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에 대해서 이해하려면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친 가요계의 전반적인 판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서 당대 최고의 가요계의 여왕은 이미자였습니다. 남진은 1960년대 후반에 <가슴아프게>가 히트하던 시점부터 최희준, 배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최고의 남자가수로 떠오른 동시에 이미자의 계보를 잇는 차세대 슈퍼스타로 떠올랐습니다. 이후 나훈아가 남진의 라이벌로 떠오르기는 했지만, ‘3년전쟁’이 본격적으로 막을 올리기 전까지는 당대의 가요계에서 이미자의 아성에 도전할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71년에 남진과 나훈아의 ‘3년전쟁’이 본격적으로 막을 올리게 되면서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는 남진과 나훈아에게만 집중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만큼은 그 유명한 이미자마저도 매스컴의 관심권에서 소외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매스컴에서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를 집중 조명하고, 대놓고 싸움을 붙여대는 바람에 점차 과열 양상으로 치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남진과 나훈아 양측의 극성팬들은 서로 상대편 가수의 공연 무대에서 욕설과 야유를 퍼붓는 등의 추태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72년에 남진이 MBC의 ‘가수왕’에 등극하면서 사실상 대세를 결정지었고, 1973년에 나훈아가 군입대로 레이스에서 중도에 이탈하게 되면서 연말 ‘가수왕’ 경쟁은 남진의 싱거운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경쟁자의 부재가 남진에게 당장은 화려한 승리를 안겨다 주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남진에게도 타격을 입히는 나비효과를 일으켰습니다. 이듬해인 1974년부터 매스컴에서는 더 이상 남진과 나훈아의 대결에 주목하지 않게 되었고, 흥행의 열기도 식어가면서 유행과 트렌드가 빠르게 변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1976년 이후에는 가요계의 트렌드가 더욱 급변하기 시작했고, 거기에 각종 사건사고가 속출하면서 1970년대 가요계의 대표주자였던 남진, 나훈아, 김추자, 하춘화, 송창식, 양희은 등의 스타급 가수들이 한꺼번에 정상권에서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 중후반에 남진과 나훈아는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하지는 않았고, 간헐적으로 노래를 발표하거나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사실상 반은퇴 상태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면서, 가요계를 떠나서 각자 사업에 열중하는 등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거센 풍파가 몰아치는 가운데에서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킨 인물은 오직 이미자뿐이었습니다. 이미자는 1966년부터 1979년까지 14년 동안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단골손님으로 출연하면서 단 한 번도 상을 놓치지 않는 저력을 과시했습니다. 1976년부터 1980년 사이에는 조용필이라는 새로운 슈퍼스타가 탄생했습니다.

 

  남진은 1980년대 초반에 미국 뉴욕에서 사업을 하다가 1982년에 귀국해서 신곡인 <빈잔>을 발표하면서 가요계에 복귀했습니다. 온라인 상의 신문 기사나 칼럼을 통해서 내용을 조사할 때 대다수의 기사나 칼럼에서는 남진이 <빈잔>의 히트에 힘입어서 성공적으로 복귀했다고 나오기는 하지만, 어떤 기사에서는 남진 본인의 인터뷰에서 이 노래가 발표 당시에는 홍보도 제대로 못 해보고 묻혔다가 10년이 지나서 빛을 보기 시작했다고 언급한 그런 신문 기사도 있습니다.

 

  남진이 1982년에 컴백할 당시에는 매스컴에서 일시적으로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를 재점화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외에도 남진은 1980년대 초중반 무렵에 방송에도 간헐적으로 출연하는 등의 활동이 있기는 했지만, 사실상 제대로 된 활동을 할 기회는 거의 없었고 1980년대에 길고 긴 암흑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오늘날 매스컴에서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에 대해서 다룰 때는 대부분 두 슈퍼스타가 시종일관 용호상박의 일합을 겨뤘던 맞수였던 것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대결은 승자독식의 양상을 띠고 있었습니다. 승자가 모든 영광을 독차지하고 패자는 치명상을 입는 구도였습니다.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에서 최대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시점이 1라운드에서는 1972년, 2라운드에서는 1982년이었습니다. 1라운드의 하이라이트였던 1972년에는 남진이 완승을 거뒀고 나훈아는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2라운드의 하이라이트였던 1982년에는 나훈아가 완승을 거뒀고 남진은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1970~80년대의 전체적인 구도로 보더라도, 1970년대는 남진의 압승이었고 1980년대는 나훈아의 압승이었습니다.

 

[내용 추가]

1부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의 내용을 보충하겠습니다. 1980년대에 남진과 나훈아 두 사람은 각각 이미자와의 콜라보레이션 작업이 한 차례씩 성사되었고, 방송 무대에서 조용필과의 만남도 각각 한 차례씩 성사되었습니다.

 

1985년 8월에 이미자와 남진은 한국 가요의 대표곡 50곡을 부른 음반을 일본에서 출시했습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1985년 8월 7일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서 나오는 내용인데, 일본의 <낸킹레코드>사에서 <한국 가요의 계보를 듣는다>는 타이틀로 출시한 이 앨범에서는 이미자를 ‘한국 연가의 여왕’, 남진을 ‘베테랑 가수’라고 홍보했습니다.

 

1986년에 KBS의 <100분쇼>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이미자와 나훈아의 <2인 콘서트> 무대를 마련했습니다. 유튜브에는 이 공연 실황의 영상이 올라와 있습니다. <KBS Star TV: 인물사전>이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공개한 영상 자료입니다. 1980년대 이후로 한국의 전통가요를 대표하는 양대산맥으로 자리매김한 이미자와 나훈아, 두 사람이 함께 콜라보레이션 무대를 꾸몄던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1982년 <MBC 10대가수 가요제>에는 나훈아와 조용필이 출연해서 한 무대에 섰는데, 쉽게 보기 힘든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조용필은 새로운 시대의 가요계의 제왕으로 떠올랐던 시점이었고, 나훈아는 화려하게 복귀해서 전통가요의 황제로 자리매김했던 시점이었습니다. 이날 시상식의 대상 수상곡은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었습니다. 피날레 무대에서는 이용이 앵콜곡으로 <잊혀진 계절>을 불렀는데, 이용의 왼쪽에는 나훈아, 오른쪽에는 조용필이 자리를 잡고 <잊혀진 계절>을 함께 부르며 피날레 무대를 장식했습니다. 후배 가수의 대상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전설적인 대선배 가수들이 무대를 빛내주었던 아름다운 광경이었습니다.

 

1986년 12월에는 <KBS 가요무대 - 광주 시민과 함께>라는 특집 방송이 방영되었습니다. 유튜브에서는 <KBS 같이 삽시다>라는 채널을 통해서 이날 방송 자료의 영상이 공개되어 있습니다. 이날 방송 내용 중에는 가수들이 순서대로 제비뽑기를 통해서 팬들의 신청곡을 부르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조용필의 순번에서는 남진의 <가슴아프게>가 뽑혔고, 남진이 지켜보는 앞에서 조용필이 <가슴아프게>를 열창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1982년에는 가요계에서 나훈아가 먼저 컴백해서 자리를 잡고 있었고 남진도 곧 컴백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명대결 - 나훈아와 남진>이라는 제목의 칼럼 시리즈를 총 11부작으로 연재했습니다. 이 칼럼 시리즈에서 당시 미국 뉴욕에 체류 중이었던 남진과는 전화로 인터뷰를 진행했고, 국내에 체류 중이었던 나훈아와는 직접 인터뷰를 진행했었습니다.

 

1982년 5월 1일자 동아일보에는 <명대결 - 나훈아와 남진> 시리즈의 마지막회인 11회가 연재되어 있습니다. 칼럼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남진의 컴백을 앞두고 이에 대해 나훈아의 인터뷰 발언을 실으며 끝을 맺고 있습니다. 당시 칼럼 시리즈의 마지막 부분에 연재됐던 내용을 그대로 한번 옮겨보겠습니다.

 

그래서 흥행계에선 남진이 귀국하면 나훈아와 함께 하는 리사이틀을 준비 중이라는 소문도 나돈다. 나훈아는 이렇게 얘기한다.

“올 테면 빨리 와라. 그리고 조용히 올 게 아니라 뉴요크에서부터 떠들어대면서 와달라. 그래서 국내 가요계와 흥행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어보자.”고.

명대결 - 나훈아와 남진. 끝.

 

한편 1987년 KBS의 <스타데이트>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사상 최초로 남진과 나훈아의 동반 출연이 성사되었습니다. 이날 방송 자료의 몇몇 부분이 담긴 영상들이 유튜브 채널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남진과 나훈아는 전성기 시절에는 주변에서 하도 싸움을 붙여대다 보니까 실제로도 뭔가 껄끄럽고 불편한 관계였던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한참 흘러서 연륜이 쌓인 뒤에는 방송에 함께 출연해서 그 시절의 추억에 대해서 서로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오늘날의 10대부터 40대까지의 연령대의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부연설명을 덧붙이자면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만화나 영화, 드라마 등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스토리에는 이러한 장면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철천지 앙숙이었던 두 주인공이 세월히 한참 흐른 뒤, 젊은 시절의 대결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우리 참 좋은 시절 보냈지.” 하면서 회상하는 장면은 꽤나 빈번하게 사용되는 소재입니다.

 

남진과 나훈아가 바로 그런 관계였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실제로도 사이가 안 좋았던 시절이 분명히 존재했지만, 세월이 한참 흐르고 연륜이 쌓인 뒤에는 서로 함께 마주보고 웃으면서 “참 재미있는 시절이었다.”고 회상할 수 있는 그런 여유가 생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방송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을 기점으로 해서, 남진과 나훈아, 두 슈퍼스타는 비로소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게 됩니다.

 

  1980년대에 남진은 가수 활동을 제대로 할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방송 출연을 아예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전성기 시절처럼 왕성하게 활동을 펼치지는 못했습니다. 1970년대 초중반까지는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가수 겸 영화배우로 만능 엔터테이너로 활약했지만, 1980년대에는 <빈잔> 이외에는 이렇다 할 히트곡을 내지 못했습니다.

 

  당시 남진이 신군부에 의해서 탄압을 받아서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 시절 탄압받은 연예인이 남진 혼자는 아니었지만, 남진은 그중에서도 탄압의 정도가 더 심했다고 합니다. 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에서 1980년대 초반의 몇몇 기사를 검색해보면 당시의 흉흉했던 사회 분위기를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80년 8월 29일 동아일보 기사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심수봉, 이수미, 정훈희, 남진, 나훈아, 태진아, 옥희, 배삼룡, 이주일, 이기동, 장고웅, 홍세미, 허진, 이수련 등 연예인 24명 출연 금지.

TV, 라디오 5개사 결정.

 

심수봉 등 가수 7명과 배삼룡 등 코미디언 4명, 홍세미 등 TV 탤런트 13명 등 모두 24명의 연예인이 오는 9월 1일부터 TV나 라디오에 일체 나오지 못한다. 이는 28일 열린 5개 TV, 라디오사 심의실장회의에서 결정된 것으로 이들은 (1)불건전한 사생활을 해오고 있거나 (2)혐오감을 주는 연예인 (3)창법, 연기 등이 저속한 연예인들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1일부터 출연을 못하게 되는 연예인들은 다음과 같다.

가수 - 심수봉, 이수미, 정훈희, 남진, 태진아, 옥희, 나훈아.

코미디언 - 이주일, 배삼룡, 장고웅, 이기동.

TV탤런트 - 홍세미, 허진, 이수련, 김윤택, 김정희, 조미례, 김동수, 유종근, 유병한, 안강진, 박춘심, 박선옥, 한지하.

 

  다음은 1982년 6월 15일 조선일보 기사입니다.

 

외국 살다 오면 환대하는 특별무대 보기 역겹다. 조선일보 기사(칼럼/논단).

연예인으로 개선장군 대우를 받고 TV 방송의 특별 프로그램 출연 교섭을 받으려면 해외로 이민 가거나 외국에 오랫동안 체류하다 귀국하는 길밖에 없을 것 같다. 외국에 나간 이유야 어떻든, 활동을 계속 했건 안 했건간에 그들이 일시 귀국하기만 하면 국내 TV들이 다투어 화려한 특집을 제공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KBS 제1TV는 12일 밤 특집쇼 남진과 함께를 1백분간 방영했다. 방송국 측의 기획의도는 전성기를 누린 가수 중 남진만큼 히트곡을 많이 낸 가수가 드물고 시대가 달라졌다 해도 그를 좋아하는 많은 팬들이 있는 만큼 그들을 위해 순수한 입장에서 그를 출연시켜 볼만한 쇼를 엮어보려 했다는 것이었다.

 

그 의도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시청자도 있을지 모르나 그렇지 못한 시청자도 적지 않다. 방영 도중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짜증섞인 항의를 하는 시청자가 있는가 하면 가수면 다 가수냐고 흥분하는 독자도 있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TV에 나온 가수를 탓할 수는 없다. 가수는 방송국 측의 요청이 있어서 출연에 응한 것인 만큼 문제가 있다면 방송국에 있다고 하겠다.

 

남진은 나훈아와 쌍벽을 이루며 70년대를 누빈 인기가수임에 틀림없다. 왕년의 인기가수답게 스페셜 쇼에서도 노래 재능만큼은 유감없이 발휘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는 노래를 버리고 팬을 외면한 채 가요계를 떠났고 얼마 후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고국을 등졌다. 그의 미국행이 사생활에 속하는 것이라 해도 가수로서의 그가 노래수업을 하러 간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어떤 경로로 출국했고 어떤 방법으로 미국에 정착했는지는 우리 시청자가 알 바 아니다. 그가 일시 귀국한 이유도 노래를 다시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가정의 일과 사업관계라고 전해졌다.

 

그런 그를 TV 두 군데가 다투어 출연시키려고 열띤 교섭을 벌인 끝에 KBS가 그를 시청자 앞에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히트곡이 많고 노래를 잘하고 고정팬이 있어서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앞세웠지만, 속셈은 오랫동안 브라운관을 떠나 있던 가수를 앞세워 시청자를 모으고 광고효과를 높여보자는 전략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TV쇼는 아마추어 가수들의 노래자랑 경연을 제외하고는 직업가수들이 그들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여 시청자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위안을 제공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우리의 TV쇼는 직업적으로 노래를 하지 않는 가수를 끌어내야 인기가 있고 쇼를 잘 만드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남진 말고도 과거 조영남, 패티김, 정미조가 그랬고, 최근에는 하춘화와 나훈아가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40대도 채 되기 전의 젊은 가수들이 툭하면 은퇴다, 컴백이다 하는 것도 얄팍하고 촌스럽고 방자한 난센스지만, 조국을 떠나 다른 길을 찾겠다고 노래를 멀리했던 가수들을, 마치 금의환향한 대예술가처럼 막대한 출연료를 지불하며 TV 앞에 끌어내려는 처사는 뜻있는 시청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런 일을 반복하다 보니 돈 떨어지면 일시귀국하여 돈벌이 하고 간다는 풍문도 나올 법하다.

 

수천만 시청자를 대상으로 하는 TV가, 특히 공영방송임을 강조하는 KBS가 인기 좀 있었다고 무턱대고 귀국쇼를 제작하는 것은 실소 감이며 버려야 할 타성이다. TV는 자선 무대도 아니며, 사라진 가수들을 영웅처럼 맞이해 시청자들 앞에 세우는 흥행기관도 아니다. 귀국인사차 한두 곡의 노래와 근황을 들려주는 정도라면 또 몰라도 경사라도 벌어진 듯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그들의 목청을 내뽑게 하는 것은 전근대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남진이 귀국하여 노래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가 술집 밤무대나 극장에서 노래를 했거나, 디스크를 새로 냈다면 문제될 것 없다. 그러나 일방적 수용매체인 TV가 시청자를 위하는 척하면서 얄팍한 인기전략을 펴겠다고 앞장섰기 때문에 일부 시청자들이 그 뻔뻔함을 탓하고 나선 것이다.

 

방송국들은 국내가수가 없다고 탓하기 전에 국내가수들을 스타로 키우는 데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국내가수가 없다고 외국에 있는 가수들을 곶감 빼먹듯 해버리면 국내 가수들이 설자리는 더욱 없게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외국처럼 40대~50대의 베테랑 가수들에의 문호를 보다 넓히고, 신인을 이용하기보다 키우겠다는 열의가 앞선다면 스타가 탄생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대형 쇼를 생기 있게 하려는 방송사 측의 의도를 이해할 만도 하지만, 해외거주 연예인을 특별우대하고 경쟁을 벌이는 풍토는 시정해야 할 것 같다. 정중헌 기자.

 

  1989년에는 괴한들이 남진을 습격해서 허벅지를 칼로 찌르는 남진 피습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989년 11월 6일 동아일보에 사건에 관한 기사가 보도되었습니다.

 

가수 남진 씨 피습. 괴한 흉기에 찔려.

4일 밤 9시 50분경 서울 중구 장충동2가 타워호텔 카바레 주차장에서 가수 남진 씨가 20대 남자 3명의 기습을 받아 왼쪽 허벅지를 흉기에 찔리는 등 전치 3주의 상해를 입고 순천향병원에 입원, 치료중이다.

 

  1980년대는 남진에게 시련이 연속으로 들이닥쳤던 최악의 암흑기였습니다. 남진의 가수 인생을 전반적으로 돌아보면, 1960년대~1970년대에는 찬란한 전성기를 누려오다가 1980년대에는 최악의 암흑기를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로 접어들면서 남진은 서서히 옛 명성을 회복하기 시작하고 2010년대 이후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3부에서 계속됩니다.)

 

  이제 격동의 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서 90년대를 맞이하게 됐습니다. 당시 남진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은 남진의 찬란했던 ‘과거’ 영광에 대해서는 누구나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현재’ 모습에 대해서는 약간은 낮춰서 보거나 무시하는 듯한 분위기가 좀 있었습니다. 이제 남진은 마치 신인가수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1993년에 남진은 <내 영혼의 히로인>을 발표하면서 옛 명성을 조금씩 되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1982년에 발표한 <빈잔> 이후로 무려 11년 만에 탄생한 히트곡이었습니다. 남진의 가수 인생에 있어서 파트너쉽을 맺어온 대표적인 작곡가들로는 박춘석 선생, 남국인 선생, 김영광 선생이 있었습니다. <울려고 내가 왔나>는 김영광 선생에게 받은 곡이었고, <님과 함께>는 남국인 선생에게 받은 곡이었으며, <가슴아프게>, <마음이 고와야지>, <빈잔>, <내 영혼의 히로인>은 박춘석 선생에게 받은 곡이었습니다.

 

  1999년에 남진은 차태일 작곡가를 만나면서 새로운 파트너쉽을 맺게 됩니다. 남진은 1999년에 신곡 <둥지>를 발표했습니다. 차태일 작곡가에게 받은 곡인 <둥지>는 1999년에 발표해서 2000년대 초반에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남진의 21세기 첫 히트곡인 <둥지>와 21세기 대표곡인 <나야 나>는 모두 차태일 작곡가에게 받은 곡이었습니다. <둥지>의 히트를 계기로 해서 남진은 좀 더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남진은 2002년에 <모르리>, 2005년에 <저리가>, 2006년에 <빈 지게>, 2008년에 <나야 나>, 2009년에 <당신이 좋아>, 2011년에 <너 말이야>, 2012년에 <이력서>, 2014년에 <파트너>를 발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2008년에 발표한 <나야 나>는 발표 당시에도 상당한 인기를 끌었고, 2010년대 이후 후배 가수들이 재해석하면서 또다시 화제가 되었습니다. 2009년에 발표한 <당신이 좋아>는 신세대 트로트 가수 장윤정과 듀엣으로 부른 곡이었습니다.

 

  남진은 2008년에 <대한가수협회>의 초대 회장이 되어서 3년간 회장 직을 역임했습니다. 2000년대 후반 이후부터 남진은 TV 방송 프로그램에도 꾸준히 출연하면서 대중들에게 좀 더 친숙하게 다가서기 시작했습니다. 2010년대에 들어서 남진은 가수 인생의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남진의 제2의 전성기의 계기가 된 방송 프로그램은 2011년 가을에 추석 특집으로 방영된 MBC의 <나는 트로트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사실 남진과 같은 전설의 가수가 경연자로 직접 참여하는 데에는 위험부담이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결과가 좋지 못할 경우 이미지가 실추되거나 안티들의 조롱거리가 될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는 부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진은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경연자로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트로트의 붐을 조성하고 전통가요의 명맥을 잇기 위한 자리라면 어디든 기꺼이 달려가서 자리를 빛내주었습니다.

 

  이러한 남진의 진심은 팬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2011년 <추석특집 나는 트로트 가수다>에서 남진은 심수봉의 <비나리>를 경연곡으로 선곡해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위험부담을 마다하지 않고 경연자로 참여해서 우승까지 거머쥐면서 남진은 전설의 클래스를 입증했습니다. 이듬해인 2012년 <설특집 나는 트로트 가수다>에서는 남진이 직접 경연자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문주란이 남진의 <나야 나>를 선곡해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남진의 <나야 나>는 2008년 발표 당시에도 인기를 얻은 데 이어서, 2012년에 문주란이 재해석해서 경연 프로그램의 우승까지 차지하면서 다시한번 대중들에게 주목받았습니다. 몇 년 후에는 신세대 트로트 가수인 김수찬이 또다시 남진의 <나야 나>를 재해석한 무대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나야 나>는 남진의 대표적인 21세기 히트곡으로 떠올랐습니다.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가요계에서는 복고 열풍과 함께 전설들을 예우해주는 문화가 확산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한때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사이에는 전통가요 가수들이나 7080 시대 가수들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옛 전설들을 다시 존중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힘입어서 남진도 전설로서의 명예가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대중가요계에서 공식적인 ‘명예의 전당’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명예의 전당’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TV 방송 프로그램이 몇 개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파급효과가 큰 프로그램은 KBS의 <불후의 명곡>입니다. 남진은 KBS의 <불후의 명곡>에 2011년에 처음으로 출연한 데 이어서,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전설로 출연하면서 전설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2013년에 남진은 JTBC의 <히든싱어>라는 프로그램에도 출연했습니다. <히든싱어>는 대체로 1990년대나 200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가수들이 주로 출연하던 프로그램이었는데, 남진은 이 프로그램에도 기꺼이 출연하면서 젊은 세대와도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남진은 2010년대에 신곡도 여러 곡 발표하고 방송 활동과 공연 활동에도 활발하게 참여했습니다.

 

  2014년에 데뷔 50주년을 맞이한 남진은 신곡 <파트너>를 발표했습니다. 광주 MBC 방송국에서는 남진의 데뷔 50주년 기념 특집 프로그램인 <님과 함께>를 2부작으로 기획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여러 후배 가수들이 출연해서 남진을 위한 헌정 무대를 선보였습니다. 남진은 2014년 5월부터 전국투어 콘서트를 열었고, 2014년 10월 25일에는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데뷔 50주년 기념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남진의 데뷔 50주년 기념 공연은 오후 2시와 오후 7시에 걸쳐서 총 두 차례 공연으로 개최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전설의 국민가수 다섯 분 중에서 데뷔 50주년을 맞이한 순서는 각각 패티김 2008년, 이미자 2009년, 남진 2014년, 나훈아 2016년, 조용필 2018년입니다. 그리고 이들 중 패티김은 데뷔 55주년인 2013년에 은퇴투어 콘서트의 피날레를 장식했고, 이미자는 데뷔 60주년인 2019년에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2019년과 2020년에 걸쳐서 TV조선에서는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트로트의 붐을 조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송가인, 임영웅이라는 새로운 스타의 탄생과 더불어서 대한민국에는 트로트 열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지상파와 케이블 TV 방송에서도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이 줄지어 탄생했습니다.

 

  남진은 <트롯 전국체전>, <트롯신이 떴다> 등의 경연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습니다. 트로트의 붐을 조성하고 전통가요의 맥을 잇기 위한 자리라면 남진은 그 어느 곳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본인이 전설로서 예우를 받는 것에 안주하지 않고, 전통가요의 명맥을 잇는 후배 가수들을 진심으로 격려하면서 트로트와 전통가요계의 진정한 큰형님으로서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2020년 추석에 TV조선에서는 <제1회 트롯어워즈> 시상식을 개최했습니다. 이 시상식에는 <미스터트롯>을 통해 트로트 아이돌로 떠오른 임영웅, 영탁 등이 참여한 가운데 이미자, 남진, 하춘화, 주현미 등의 트로트 레전드 가수들도 초청을 받았습니다. 2020년의 트로트 열풍을 계기로 트롯 100년사를 정리하고 전통가요의 붐을 계승하기 위한 뜻깊은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2020년 <제1회 트롯어워즈>에서 ‘트롯 100년 대상’은 이미자가 수상했고, ‘트롯 100년 가왕상’은 송대관, 현철, 태진아, 김연자, 김수희, 하춘화, 남진, 나훈아, 설운도, 주현미, 장윤정이 수상했습니다. 남자 신인상은 임영웅, 여자 신인상은 송가인이 수상했습니다. 남진은 ‘트롯 100년 가왕상’ 이외에도 ‘공로상’도 수상하면서 2관왕에 등극했습니다.

 

  2020년 11월에 남진은 신곡 <오빠 아직 살아 있다>를 발표했습니다. 남진의 신곡 뮤직비디오에는 후배 트로트 가수들이 까메오로 출연했습니다. 라틴풍의 경쾌한 리듬에 유쾌한 가사로 남진 특유의 재치와 끼를 표현하며 역시 남진이라는 찬사를 얻었습니다. 데뷔 55주년을 맞이한 남진의 신곡 <오빠 아직 살아 있다>는 SBS의 트로트 예능 프로그램인 <트롯신이 떴다>에서 최초로 공개되었습니다.

 

  2021년에 접어들면서 가요계의 역사를 기록하고 정리하는 대표적인 TV 방송 프로그램 두 개가 탄생했습니다. SBS의 <아카이브 K>와 MBN의 <인생앨범 예스터데이>라는 프로그램이 뜻깊은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본질적으로 같은 목표를 지향점으로 두고 있지만, 두 프로그램의 성격에는 약간의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SBS의 <아카이브 K>는 주로 1990년대를 풍미했던 스타 가수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프로그램이었고, MBN의 <인생앨범 예스터데이>는 7080 시대의 전설의 가수들을 게스트로 초청해서 음악 인생 전반을 되돌아보고 역사와 추억을 새기는 무대를 마련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2021년 1월에 남진은 <인생앨범 예스터데이>에 출연했는데, <인생앨범 예스터데이 - 남진 편>은 총 2부작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MC는 안재욱, 주현미, 김재환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남진의 가수 인생을 돌아보고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헌정공연 무대가 마련되는 등의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 자체가 사실상의 ‘명예의 전당’ 또는 ‘타임캡슐’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남진은 이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데뷔곡이었던 <서울 푸레이보이>와 금지곡으로 묻혔던 아픈 기억이 있는 <연애 0번지>를 최초로 방송 무대에서 선보였습니다. 그밖에 남진의 불멸의 히트곡들을 남진 본인이 직접 부르기도 하고 여러 후배 가수들이 출연해서 대선배 남진을 위한 헌정공연 무대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진의 젊은 시절의 우상이었던 대선배 가수인 남일해, 쟈니리의 깜짝 출연도 있었습니다. 남진과 함께 월남전에 함께 파병돼서 죽을 고비를 함께 넘겼던 전우였던 분이 깜짝출연하면서 무려 50여년 만에 극적인 상봉을 하기도 했습니다. 자료화면에서는 옛 선배가수였던 고 최희준 선생과 전설의 작곡가였던 고 박춘석 선생의 생전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21세기 들어서 남진과 파트너쉽을 맺은 차태일 작곡가의 깜짝 출연도 있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남진의 자작곡 두 곡이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남진이 생애 최초로 작곡한 노래인 <그리울 텐데>는 남진과 절친한 관계인 백일섭의 신청을 받아서 남진이 직접 무대를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1992년에 남진이 작사에 참여했던 노래인 <바다>는 팝페라 가수 손태진이 무대를 선보였습니다.

 

  남진의 자작곡 두 곡 중 한 곡인 <너는 내 세상>은 신세대 트로트 가수인 신인선이 무대를 선보였습니다. 이 노래는 <미스터트롯>에서 김경민이 불러서 한 차례 화제가 된 데 이어서, <인생앨범 예스터데이>에서는 신인선이 다시한번 무대를 선보였습니다. 이 무대를 직접 지켜본 남진은 신인선을 향해서 ‘차세대 엘비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프로그램의 피날레는 남진의 <리사이틀> 공연으로 장식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관객과 직접 대면할 수 없었던 아쉬움이 있기는 했지만, 남진의 <리사이틀> 무대는 객석의 빈자리를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뜨거운 열기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남진의 57년 가수인생을 결산하고, 그 역사와 추억을 타임캡슐에 저장하는 의미를 지닌, 감격의 순간이었습니다.

 

  이 콘텐츠를 작성하고 있는 2021년 현재, 남진은 데뷔 57주년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3년 후인 2024년에 남진은 데뷔 6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벌써부터 미래의 일을 예측한다는 것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만약 남진이 2024년에 데뷔 60주년 기념 공연을 성사시키게 될 경우, 대한민국의 현존하는 전설의 가수 중에서 이미자에 이어서 통산 두 번째로 데뷔 60주년 기념 공연을 성사시키게 됩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설의 국민가수 다섯 분 중에서 패티김은 데뷔 54주년이었던 2012년에 은퇴를 선언한 뒤, 데뷔 55주년을 맞이한 2013년에 은퇴투어 콘서트를 마치고 공식적인 활동을 마무리했습니다. 이미자는 데뷔 60주년이었던 2019년에 은퇴를 선언한 뒤, TV 방송 프로그램에는 2019년에 KBS의 <송년특집 불후의 명곡>에 특별출연했고, 2020년에 TV조선의 <제1회 트롯어워즈> 시상식에 참여해서 특별 무대를 선보인 바 있습니다.

 

  이제 남진, 나훈아, 조용필 세 분만이 마지막까지 현역으로 남아 있으며 차례로 데뷔 60주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에서 남진이 가장 먼저 데뷔 60주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대한민국의 현존하는 가수 중에서 데뷔 60주년을 넘겨서 65주년, 70주년까지 활동한 사례는 없었습니다.

 

  2021년 현재 데뷔 57주년째를 맞이하고 있는 남진은 여전히 “오빠 아직 살아 있다”를 외치며 정열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남진의 팬이었던 분들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오랫동안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 남진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출처 : 위키백과, 나무위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그 외 신문 기사, 텔레비전 방송, 인터넷 뉴스 기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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